1916년 1월 20일에 柳晦植이 시대 상황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전하고 곧 방문할 것임을 알리기 위해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
1916년 1월 20일에 柳晦植이 시대 상황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전하고 곧 방문할 것임을 알리기 위해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이다.
두 달은 서쪽에서 한 달은 남쪽에서 저녁이 되면 잘 곳을 찾았는데, 돌아옴에 小孫이 책상 선반에서 한 작은 함을 내었으니 그대의 편지였다고 하였다. 놀라 기뻐서 마음으로 ‘대단하다 친구의 의리여.’라고 외쳤다고 하였다. 편지를 보니 근심스런 처지를 기록함에 가슴 속의 일을 모두 말하며 간절한 마음을 그냥 두지 않았으니 百朋의 큰돈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것에 해당되겠느냐고 하였다. 다만 때를 넘겨 늦게 답장을 쓰는데 3달이 지났고 새해가 되었다고 하였다. 추위가 매서운데 건강하고 다복하게 지내는지 물었다. 형제끼리 멀리 떨어져 지내는 회포를 쇠노한 지경에 견딜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때때로 風雨속에 상을 나란히 하고서 촛불을 밝히고 한가로이 토론하는 공부를 하는지, 아들은 공부가 많이 늘었을 것인데 이미 관례를 치렀는지 궁금해 하였다. 자신은 갖가지 병으로 쓰러졌고 喪亂으로 꺾였고 쇠약해져 곤란하였고 모양은 또한 말랐고 시력은 혹 맹인 같아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물며 자신은 귀양살이를 하여 한 배 더 고통스럽다고 하였다. 세상이 장차 저물려 하는데 四方으로 펼치려는 뜻은 이미 게을러졌고 그 꾀하여 하는 것은 다만 아이를 공부 시키고 농부를 훈계하는 몇 건의 일일 뿐인데 그러나 아이는 읽기에 둔하고 밭 갈기에 게으르니 세상에 붙어 살 재미를 붙일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세상이 한번 뒤집어진 이후로 文學을 보기를 한 번 쓰고는 버리는 弁髦같이 보고 功利로 나아가기를 裘葛을 찾듯이 하며 剝陰(剝卦의 陰爻)에서 끝까지 간 것을 잡으려니 上九爻의 먹지 못하는 과실[不食之果]이 어디에 붙어 있겠느냐고 탄식하였다. 이른바 나로부터 선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니 다만 詩人의 탄식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근래에 蘿를 찾아갈 일이 있어 한번 나들이할 것 같은데, 蘿는 무실과의 거리가 하루아침 거리도 되지 않으니 어찌 지름길로 돌아가 버리며 들러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멀리서 쇠약한 얼굴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암담하다고 하였다. 泗上의 兩喪은 더욱 조락하는 탄식을 금할 수 없지만 해도 바뀌어 좇아 탄식한들 무엇 하겠느냐고 하였다. 大圭는 근래 어떤지 궁금해 하였다. 景斗兄이 옛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것이 禮樂을 베풀 일이고 지금 세상 어느 곳에 다시 무릉도원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발급인 柳晦植(1858~1930)은 본이 豊山이고 자가 元燁며 호가 琴下이다. 부는 柳道永이고 안동에 거주하였다. 柳潤文과 金興洛의 문인이다. 수취인인 李鉉謨(1853~1927)는 본이 載寧이고 자가 景贊이며 호는 仁廬 또는 亦人齋이며 李壽五의 제 3자이다. 寧海 仁良里에서 태어났다. 1896년에 英陽 石保面 做士洞으로 이주하였고 『仁廬處士遺稿』가 전한다.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