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4월 8일, 李裕容이 문집 수정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1914년 4월 8일, 李裕容(1874~1923)이 문집 내용을 수정해주기를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 측의 안부에 대해 묻고, 깊은 골짜기로 이거하여 지내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梅軒 琴輔先生의 문집을 간행하는 것은 斯文의 큰 행운인데, 자신의 집안과는 대대로 교분이 있어 문집을 반질하는 명부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문집 내용 중 연보의 갑자년 4월조에 "與同門諸友陪退溪先生遊淸凉山"의 주각에 "李筠軒某"라고 되어있는데, 琴輔선생의 시권 「淸凉蓮臺寺敬次退溪先生韻」의 小序에는 "先生率諸生入淸凉"이라고 한 아래에 "李筠軒某丈"이라 되어있으니, 이것은 원본을 교감할 때에 우연히 빠뜨려서 생긴 오류라고 하였다. 자신의 선조인 碧梧 李文樑이 退溪 李滉과 매우 돈독한 사이이며 도산급문제현들과는 연령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은 『陶山集』 속에 상세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지난해에 상대방 문중의 國普 형을 만나서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아뢰어 내용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아 몹시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헤아려 빨리 문집 내용을 개정하여서 선조의 유적에 혐의가 없게 해달라고 거듭 부탁하면서 편지 내용을 마쳤다.
이 편지는 「梅軒集」이 간행될 때 李裕容이 자신의 선조 李文樑(1498~1581)과 관련된 내용 중 호칭을 수정해 주기를 요청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매헌집」은 琴輔(1521~1585)의 문집으로 총 2권으로 되어 있는데, 금보는 자가 사임(士任), 琴啓의 손자이다. 1554년(명종 9),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학문연구에 전념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제자 가운데 3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李叔樑 · 吳守盈과 함께 ‘宣城三筆’이라 일컬어졌다.
이 편지의 발급자인 李裕容은 자는 宏甫, 호는 汾庵, 본관은 永川이며, 부친은 李羲肇, 아우는 李裕憲이다. 저서로는 「汾庵遺稿」가 전한다. 이유용이 언급한 碧梧先祖는 바로 李文樑(1498~1581)인데, 자는 大成, 호는 碧梧, 부는 琴賢輔, 平陵道察訪을 역임하였으며, 이황과 절친하였고 문장이 뛰어났다. 그리고 내용에서 언급된 國普 형은 바로 琴東烈(1872~1945)의 字인데, 호는 醒山이고 琴儀의 후손이다. 이황 문하의 세 명필 중 한 사람인 琴輔의 맥을 이은 명필가이며, 「한양가」를 비롯한 많은 유묵과 저서 「醒山遺稿」가 전한다.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