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12월 17일, 宜齋 姜泌이 봄에 상대의 방문을 청하기 위해 奮山 柳淵鱗에게 보낸 편지
1913년 12월 17일에 宜齋 姜泌(1878~1942)이 봄에 상대의 방문을 청하기 위해 奮山 柳淵鱗(1868~193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乃德 君이 눈길을 뚫고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을 방문해 준 데 대해서 기뻤던 마음을 표하고, 그를 통해 상대 및 아들들, 손자, 同堂 여러 사람들이 병에서 회복되었거나 평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기쁜 마음을 전하였다. 姜泌 자신은 다행히 時事가 조금 안정이 되어 옛날의 모습대로 집안으로 돌아와 조용하게 지내고는 있으나, 연로하신 어버이의 악화된 병환으로 인하여 늘 시탕하고 지내고 있다고 하면서, 애타고 두려운 심정을 전하였다. 또한 이로 인해 어버이 곁을 떠나기가 어려워서 상대를 만나러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도 전하였다.
상대가 봄에 남쪽으로 행차하여 몇 달 동안 두루 유람할 일에 대해 아마도 壯觀이 많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太白山은 곧 壽爺[壽靜齋 柳鼎文]와 松祖[松西 姜橒]의 遺躅이라고 하면서, 상대가 이쪽을 한 번 유람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땅을 사준 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염려하여 만류하였건만 乃德이 떠나서 헤어진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표하였다. 끝으로, 점점 악화되고 있는 상대 부인의 병은 반드시 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빨리 치료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낫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宜齋 姜泌은 白樵 姜夏奎의 손자이자 晩山 姜鎔의 아들이다. 姜鎔은 壽靜齋 柳鼎文의 아들 孔巖 柳致好의 딸인 全州 柳氏와 혼인하여 姜泌을 낳았다. 姜泌은 편지의 본문에서 자신을 表再從弟라고 하였으니, 수신자는 壽靜齋 柳鼎文의 曾孫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데, 아마도 奮山 柳淵鱗인 것으로 보인다. 姜泌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