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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이현채(李鉉埰)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913.4776-20130630.06592570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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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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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현채, 이현모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작성시기 1913
형태사항 크기: 24 X 49.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일월 재령이씨 인려후손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13년 이현채(李鉉埰) 서간(書簡)
1913년 12월 29일 歲暮에 族弟 李鉉埰가 당시 세태와 陶山及門錄과 관련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한탄스러운 심정을 전하기 위해 族兄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이다. 새해가 되면 漢나라 孔融의 탄식과 같이 나이가 쉰두 살이 되는데 漢나라 劉向을 모범을 본받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옛적의 유풍이 씻은 듯이 사라진 세태를 개탄하고 『陶山及門錄』에 인명을 함부로 추가하는 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김 한 첩을 보낸다고 하였다.
김정민

상세정보

1913년 12월 29일에 李鉉埰가 陶山及門錄과 관련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전하기 위해 族兄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
1913년 12월 29일 歲暮에 族弟 李鉉埰가 당시 세태와 陶山及門錄과 관련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한탄스러운 심정을 전하기 위해 族兄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의 歲暮에 무한히 가라앉은 심정을 말하고, 새해가 되면 나이가 쉰두 살이 되는데 漢나라 孔融의 탄식과 완전히 부합한다고 하면서 漢나라 劉向을 모범을 본받지 못함을 한탄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세태가 과거의 유풍이 씻은 듯이 사라져 이를 돌이키지 못하는 데 대해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이전에 族兄 李鉉謨가 좌중에서 이러한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며 주선하는 것을 목격하고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고 하면서 陶山及門錄에 인명을 함부로 추가하는 일에 대해 한탄하였다. 새해 건강하기를 바라며 김 한 첩을 보낸다고 하였다.
발급인인 李鉉埰(1863~1922)는 본이 載寧이고 자가 舜翼이며 호는 石可軒이다. 李秀榮의 손자이고 英陽 石保面 院里에 거주하였다. 수취인인 李鉉謨(1853~1927)는 이현채의 족형으로 자가 景贊이고 호는 仁廬 또는 亦人齋이며 李壽五의 제 3자이다. 寧海 仁良里에서 태어났다. 1896년英陽 石保面 做士洞으로 이주하였고 『仁廬處士遺稿』가 전한다. 『仁廬處士遺稿』권2의 「答族弟舜翼 鉉埰 甲寅」은 본 서간에 대한 답신이다.
본 서간은 앞부분이 탈락되었는데 서두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仁廬處士遺稿, 李鉉謨, 2003
김정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13년 이현채(李鉉埰) 서간(書簡)

▣…▣
非尋常例語也。伏惟日者。
靜體莫無撓攘餘憊。眷致一安。
族少弟。劣狀依遣。而歲暮孤露
之感。荒墜紛如之歎。到底益
深。撫循生平。無一事做當。而洽爲
望六之人。俯仰慙怍。不勝愧君。孔北
過二之歎。適副其年。而未效
更生
革舊之願。古今人懸遠。若是
其甚耶。矧今何等際也。遺風掃
地。古道未聞。今日後生力量手分。固
不足以收回補掇。而竊以是中夜震
惕。長慮却顧。則有所受之矣。每
向座下。說到那邊者。誠以是周旋側聞
於往日間席之下故耳。自餘山外
悠悠耳。不欲語。而陶山及門錄事。畢
竟釀出事端。至有河上奉諱之
擧。從此鄒魯。便成蠻觸之場。其
在岸上地。只當袖手塞兌。而豈非大
關氣數之湫傾耶。還用慨歎耳。
餘忙倩不備上。惟祝
餞迓增休。以副鄙忱耳。
癸丑 十二月 卄九日。族少弟 鉉埰 二拜上。

海衣一帖。仰呈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