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9월 18일, 이종하가 이만도의 자정순국 등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910년 9월 18일에 石皓 李鍾夏(1839~1916)가 響山 李晩燾의 자정순국 등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늘 서글프고 그리워하였는데 더구나 국가는 위태롭고 정이 두터운 이는 喪難을 당한 때임에랴 말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어, 깊은 가을에 喪中에 있는 상대가 건승한지, 아드님은 그 어머니를 모시고 祝庭(외가)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미 돌아왔는지, 손녀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響山 令公께서 큰 절개를 이루셨으니 공적인 견지에서는 吾黨이 함께 영광되지만 사적인 견지에서는 위태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둠 속을 헤매는 탄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더구나 평소 響山을 아버지처럼 섬기던 상대의 입장에서는 공적인 견지에서 사적인 슬픔을 버리지 못할까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殉國烈士 李晩燾와 石隱 柳基鎬는 서로 사돈지간이다. 李晩燾의 딸인 眞城李氏가 柳基鎬의 장남인 奮山 柳淵鱗과 혼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의 수신자는 奮山인 것으로 짐작된다. 李鍾夏 자신은 좁은 집과 가난한 살림에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갈수록 어렵다고 하면서, 난감함을 전하였다. 德瞻 族叔께서 하나 남은 손자마저 잃었으니, 天理가 본래 이런 것이냐며 애통한 심정을 표하였다. 더구나 그 죽은 손자의 재주와 文行은 제법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이처럼 요절하고 말았으니, 더욱 族叔의 가슴에 쇠못을 박는 일이라고 하였다.
李鍾夏는 자가 禹聲, 본관은 固城으로, 平泉 李{玉+集}의 아들이다. 平地翁 李憲復의 冑孫이다. 안동 座首를 역임하였다. 그의 손녀인 李興羲가 奮山 柳淵鱗의 아들인 半啞 柳顥集에게 시집갔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