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월 25일, 起巖 李中業이 혼사 등과 관련하여 奮山 柳淵鱗에게 보낸 편지
1906년(광무 10) 1월 25일에 起巖 李中業(1863~1921)이 혼사 등과 관련하여 奮山 柳淵鱗(1868~193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甥君(柳淵鱗의 아들)이 돌아갈 때에 자신에게 절박한 우환이 생겨서 답장을 써서 보낼 겨를이 없었는데, 甥君이 그 상황을 구두로 전달하여 柳淵鱗이 이해해 주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柳淵鱗 및 누이(眞城李氏)와 생질들의 안부를 물었다. 昇이가 어버이의 명으로 억지로 平里로 가느라 말릴 수는 없었으나 그날이 길을 떠나기에 좋지 못한 날이어서 걱정을 했다고 하면서, 그가 언제 집으로 돌아갔는지 물었다. 그 외에 다른 친족들의 안부도 물었다. 伯振(所安 柳東麟) 형이 좋은 묏자리를 잡아서 葬事를 치렀는지 물었다. 또한 水谷의 근황도 평안한지 물었다.
李中業은 부친인 響山 李晩燾가 임금의 批答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縣次에서 席藁하려고 했다가 결론이 나지 않을 우려가 있을 듯하였기 때문에 才山으로 들어가셨다는 등의 소식을 전하였다. 婚事가 임박한 상황을 언급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成禮하기는 하지만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고 上疏하여 待罪하고 있는 와중에 태연스레 혼례를 치르는 것이 끝내 온당치 않은 것 같다고도 하였다. 양쪽 집안에서 번잡한 결혼식의 절차를 줄이는 데에 힘쓰는 것이 일의 체모에 합당할 듯하다고 하였다. 끝으로, 衾材의 염색이 끝났으면 그것을 이편에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추신에서는 먼저 머리 장신구와 족두리, 唐介를 이편에 함께 부쳐 보내달라고 청하는 한편 籠奩 등의 물건은 과대하게 해서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이 막혔다고 하면서, 柳淵鱗 쪽에서는 혹 자신에게 알려줄 만한 소식이 있는지 물었다. 李郞道 씨가 大邱에 체포되어 있었는데, 근래 석방 소식을 들었는지도 물었다. 德允(石南 柳鳳熙)이 12월 그믐에 풀려나서 1월 20일 쯤에는 내려올 것이라 여겼는데 현재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巖後稿』(巖后 李晩慤의 문집)를 활자로 인쇄하려는 柳淵鱗 측의 논의에 대해 매우 좋다고 평가하였다. 草本 가운데 2책을 제외한 나머지 14책을 조카 逵가 돌아오면 그로 하여금 받들고 가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李中業은 柳淵鱗에 대하여 스스로를 婦弟라고 칭하였는데, 그의 누이인 眞城 李氏가 바로 柳淵鱗과 혼인하였다. 柳淵鱗은 李中業의 부친인 響山 李晩燾의 사위이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