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2월 19일, 이선필이 사형댁인 매헌종택에 형수의 상에 대한 슬픈 마음을 자신의 근황과 함께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900년 2월 19일, 査生服人 李璿弼이 사형댁인 매헌종택에 형수의 상에 대한 슬픈 마음을 자신의 근황과 함께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처음부분에 발급인은 장사지내는 예가 갑자기 형수에게 미쳤으니 산 사람은 진실로 슬픈 지경이라고 하면서, 차마 하지 못할 것을 참아야 되고 어렵게 여겨야 될 바를 어렵게 여김이 없다고 하였다. 눈 속의 화전에 땅속 깊이 매장을 하니 이 어떤 형색이냐고 하면서 산 사람은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상중에 있으면서 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이 이에 이르러 절로 배가 된다고 하였다. 이어 슬픔을 절제하고 인내를 머금으며 전의를 이룬 두 집이 이미 끊어졌다고 조금 정을 느슨히 하는 지경이 있지 않도록 하자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말하였다.
한편, 윤형이 추위를 무릅쓰고 일부러 와서 슬픔과 기쁨이 서로 교착되니 가슴이 막힐 것 같다고 하였다. 오직 서로 위로하고 서로 위로함을 힘써서 며칠을 지내고 나니 도리어 저절로 슬프고 답답할 뿐이라고 하였다. 함씨 형이 영양 주곡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곧바로 돌아왔는지도 물어보았다.
이어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데, 상을 당한 걱정으로 남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이미 너무 번다하다고 하였다. 늘 상사, 장사, 담사로 남의 조문을 받는 것을 꼽을 수 없다고 하였다. 여러 차례 변하는 세월에 전후로 당하고 겪은 것이 넓게는 슬프고 괴로운 가운데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뻔뻔한 낯으로 말하고 얼굴빛을 드러내며 시일을 보낼 따름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어린아이가 강보에 싸여 있으면서 유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모르겠지만 하늘의 도가 혹은 돌보아서 새싹이 근간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이를 남모르게 축원한다고 하였다. 윤형이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돌아가니 사뭇 서운하고 한스러울 뿐이라고 하였다.
발급인 이선필은 본관이 全州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903년(고종 40) 4월 10일 관리서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의원면직하였다. 琴相基의 누이가 이선필의 형 李璟弼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윤형은 금상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