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3월 21일, 眞城人 李中植이 흉년이 들어 예안 부포의 봉화금씨에게 3석을 빌려주길 바라며, 우선 1석 값으로 15민을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
1893년 3월 21일에 眞城人 李中植이 흉년이 들어 예안 부포의 봉화금씨에게 3석을 빌려주길 바라며, 우선 1석 값으로 15민을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봄기운이 따사로운데 형제분의 건강은 순조로우며, 咸房 내외는 모두 태평한지, 그리운 마음 절실하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중식 집안의 소식을 전하였다. 연달아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예닐곱 집에서 중첩되어 일어나 上溪와 下溪의 무릇 7~8명이 다섯 달 동안 약탕과 棺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 모두 임시로 묻고 아픈 사람도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서로 통하고 있어 마음이 조금 수습되었음을 알렸다.
편지의 본론에는 흉년을 넘기는 것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인데, 봉화금씨에게 3석을 베풀어 주길 요청하였다. 우선 1석 값으로 15緡을 보내고 나머지는 가을에 갚겠다고 하였다. 막내 동생을 보내는데, 그가 말이 어눌한 까닭에 은혜를 베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바쁜 사정으로 서식의 예를 다 갖추지 못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편지 말미에는 추록이 있는데, 한번 왕림하시길 기다린다는 것과 막냇동생에게 15민을 전해주도록 할 것이지만, 만약 동생에게 유고가 있으면 상대방의 종에게 부칠 것이라고 하였다. 발신인 이중식은 본관이 眞城이며, 예안에 거주하였다. 진성이씨와 봉화금씨는 중첩 혼인관계에 있었으며, 흉년으로 생활이 곤궁해지자 봉화금씨에게 곡식을 빌려주길 요청한 것이다.
예안의 진성이씨는 한말 의병항쟁에 앞장섰으며, 이중식 역시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재야 유생층이 1904년 8월 서울에서 조직한 충의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신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普文學塾 건립에 앞장섰다. 이육사가 그의 손자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奉化琴氏世譜」, 奉化琴氏大宗會, 2005
「안동 부포마을」,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예문서원, 2012
김정민,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