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12월 27일, 李塤發이 상대의 편지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아버지가 귀양을 가 있는 상태에서 새해를 맞는 정황을 전하기 위해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
1887년 12월 27일, 李塤發이 상대의 편지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아버지가 귀양을 가 있는 상태에서 새해를 맞는 정황을 전하기 위해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이다.
歲暮 窮寒에 온갖 생각이 일어나는 중에 온 편지를 고마워하였다. 며칠 뒤 새해가 되는데 모친을 비롯한 여러 가족의 안부를 알아 위로된다고 하였다. 막내 형이 이주한지 달이 지나 생각이 깊어지는데 가문의 불운에 한 가닥 음덕이 발양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편지를 드려 축하드리고자 하였으나 바쁘게 날을 보내다 하지 못하여 한탄한다고 하였다. 자신은 어버이를 떠난 심회가 이 새해를 맞이하는 때를 당해 더욱 견디기 어렵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유배지에 있어 소식도 보내지 못하니 더욱 울적하다고 하였다. 9월에 쓰신 편지를 받아 조금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병을 면했고 나머지 권솔도 아무 일이 없는데 從父의 묵은 병이 추위를 당해 근래 심하게 되어 회복을 기약할 수 없어 괴롭다고 하였다. 자신은 일에 휘둘려 안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틈이 생기는 때마다 책상을 대하고 앉았으나 마음과 손이 서로 상응하질 않는다고 하였다. 때때로 가르침을 주기를 바라였다.
발급인인 李塤發(1863~1914)은 본이 載寧이고 자가 篪伯이며, 대한민국건국훈장애족장을 받은 李壽岳의 아들이다. 수취인인 李鉉謨(1853~1927)는 본이 載寧이며 자가 景贊이고 호는 仁廬 또는 亦人齋이다. 李壽五의 제 3자로 寧海 仁良里에서 태어나 1896년에 英陽 石保面 做士洞으로 이주하였다. 『仁廬處士遺稿』가 전한다.
李塤發의 부 李壽岳(1845~1927)은 자가 穉崇이고 호가 于軒으로 存齋 李徽逸의 8세손이다. 영해부 梧村里 존재종택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에 대원군이 유폐당하여 왕세자의 책봉에 참여하지 못한 일의 부당함을 들어 상소한 일로 인하여 雲圃 李中麟, 泗上 李東弼 등과 함께 4년간 明川으로 유배당하였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자 列邑에 통문을 돌려 擧義할 것을 촉구하고 1896년 영덕·영해의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부대를 이끌고 안동으로 집결 중 정부의 의병 해산 권고에 따라 자진 해산시켰다. 『于軒文集』이 있다. 1993년 大韓民國建國勳章愛族章이 수여되었다.
본 편지가 쓰인 때인 1887년에 이훈발의 부 이수악은 함경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