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1월 25일, 石隱 柳基鎬가 유배지로 떠나는 일정을 알려주고 거취 계획을 알아보기 위해 響山 李晩燾에게 보낸 편지
1886년(고종 23) 1월 25일에 石隱 柳基鎬(1823~1886)가 유배지로 떠나는 일정을 알려주고 거취 계획을 알아보기 위해 響山 李晩燾(1842~1910)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문밖에서 잠깐 만났던 일은 한갓 섭섭한 마음만 더할 뿐이었다고 하면서, 私處에 돌아오니 그리운 마음이 더욱 깊었다고 하였다. 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를 통해서, 李晩燾가 얼음이 언 길을 여행하면서 건강을 많이 해쳤다는 얘기를 상세히 듣고서 너무나 놀라고 걱정했다고 하면서, 밤사이 증세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또한 太夫人께서 한결같이 안녕하시며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평안한지도 물었다.
柳基鎬 자신은 그저께야 비로소 官文을 받았고 어제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며느리가 오니, 유배살이가 바로 눈앞에 닥쳐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매우 즐거웠다고 하였다. 配行은 2월 열흘 전에 출발할 계획이지만 준비해서 마련한 것이 아직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명령으로 仕例를 따로 정한 일로 인해 李晩燾가 한 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작정하고 있는지도 물었다. 옛 규례를 따라서 찬바람을 맞으며 올라가는 것이 출처의 의리에 흠이 없을 것 같다는 柳基鎬 자신의 의견도 아울러 제시하였다.
石隱 柳基鎬와 響山 李晩燾는 서로 사돈지간이다. 李晩燾의 딸인 眞城 李氏가 柳基鎬의 아들인 奮山 柳淵鱗에게 시집을 갔다. 柳基鎬는 1864년(고종 1)에 臨川書院의 사액을 청하는 일로 상소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데 이어, 1870년 겨울에 임천서원 청액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었다. 또한 1881년 영남만인소가 일어나고 李載先 사건이 일어나자 嶺儒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수배되었고, 1882년에는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885년에도 2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 편지는 그가 宣川에 유배가기 직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柳基鎬는 宣川의 謫所에서 이해 사망하였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