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5월 2일, 李重明이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유배 중인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86년(고종 23) 5월 2일에 晩園 李重明(1840~1913)이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유배 중인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水谷에서 바삐 인사드리고 물러난 뒤에 다시금 류기호가 유배를 떠나는 길에 나가 인사드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심사가 울적했다고 하였다. 이어, 며칠 동안 노정에 있었는지, 配所에 도착한 것은 며칠이었는지, 여독에 시달리지는 않는지, 기거가 평소에 비해 못한 것은 아닌지, 수령은 돌봐주려는 뜻을 두면서 농간을 부리지는 않는지, 士友들과 왕래하면서 쓸쓸한 근심은 없는지 등을 여쭈었다. 아울러 西土(유배 지역)와 東土(고향이 있는 영남 지역)의 환경적 차이로 인한 풍토병의 근심은 없는지 등도 여쭈었다. 원로인 류기호가 먼 곳으로 유배가게 된 것으로 인한 자신의 상실감과 비애도 전하였다. 자신은 이렇게 경치 좋은 계절을 만나게 되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더욱 한스럽다고 하였다. 그가 이 시기 父親喪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언급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행히 生家와 叔祖께서 큰 병환은 없으시나 기력과 풍채가 전날에 비해 절반이 넘도록 손상되었다고 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크다고 하였다.
이밖에 堂內 여러 사람들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으며, 큰 姪婦가 훤칠한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류기호 댁의 근황은 들은 것이 없었는데 지난달 초에 元直叔인 拙修齋 柳廷鎬을 뵈었다고 했으며, 衛將 柳星鎬의 상사에 대해 애통한 심정을 전하였다. 춘궁기에 살 길을 마련하는 방책이 전혀 없었는데 보릿고개에 이르러서 굶주린 형편은 丙丁(아마도 흉년 기근이 가장 심했던 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때보다 심했다고 하였다. 현재의 농사 형편은 풍년이 들 조짐은 있지만, 시장의 물건 값이 날로 치솟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크다고 하였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는 이때에 몸을 잘 조섭하여 귀양에서 풀려날 날을 기다리시라고 당부하였다.
李重明은 자가 繼亨, 본관은 韓山이다. 肯庵 李敦禹의 아들이며, 생부는 李敦稷이다. 안동 일직면 망호리 출신이다. 西山 金興洛, 俛宇 郭鍾錫, 大溪 李承熙 등과 교유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