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8월 8일에 李鉉謨가 심부름꾼이 일으킨 일과 형이 형의 사돈가에 해야 할 처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친형인 李鉉命에게 보낸 편지
1885년 8월 8일에 李鉉謨가 심부름꾼이 일으킨 일과 형이 형의 사돈가에 해야 할 처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친형인 李鉉命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를 받고서 형의 근력이 아직 며칠 움직일 정도는 됨을 알아서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형의 병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은듯하니 처음 효과를 본 처방을 반드시 구해서 쾌차하기를 바라였다. 조카 무리가 敏谷에 유람하고서 시를 지어 돌아온 사실에 대해 기특하다고 하였다. 舜七씨도 시를 지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하였다.
자신은 지난번의 병은 완전히 제거되었는데 지금 다시 瘴毒에 상하여 아픈 목으로 누워서 날을 보내고 있어 어른을 모시고 처자를 양육하는데 안전한 때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元坡에서 만나는 일이 17일로 정해진 것을 곤란해 하였으며, 지난번 심부름꾼이 일으킨 것이 그 때는 꺼리는 것이 많아 곤란이 되었는데 지금 확고하게 말을 한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미 몇 년이나 흘렀으니 한 달로 급하게 여길 수는 없고 하물며 본가가 일의 형세로 의탁하고 물러섰고 또 들으니 그 집에 4, 5일 동안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신의를 의심하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박곡[瓢谷]의 內行(부녀자의 행차)이 그믐날로 정해진 것을 흡족해 하였으며, 그때 兄이 반드시 査丈께 편지를 써서 깊이 자신에게로 허물을 돌리며 대략 일의 경위를 분명하게 말하여 밖으로 드러난 흠을 감출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다. 동서끼리 서로 만나는 일이 좋고 당연한 일이지만 100리에 떨어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여성의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집이 불안하므로 姪婦가 여름에 왔을 때 오히려 이곳에 한 번의 행차도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우리가 서로 가까이 지내며 선조의 훈계를 염두하며 문호를 보전할 것을 부탁하였다.
추신으로서 조각 종이를 구하지 못해 조카들에게 답을 못하는 것을 한탄스러워하였다. 맏아이가 편지가 없는 것이 혹 이곳 때문인지를 묻고 자신이 먼저 물어야 할지에 대해 물었다. 보내주신 책자를 잘 받았다고 하였다. 호랑이가 출몰하여 물린 사람이 있으니 어두울 때 조심하기를 부탁하였다.
뒷면에 낙서가 있다. “은하수 가을날 높고 시원한데[河漢高秋濶], 서리 바람 밤중에 맑게 부네[風霜半夜淸].”란 시구이다.
수취인인 李鉉謨(1853~1927)는 李鉉命(1849~1902)의 친동생으로 자가 景贊이고 호는 仁廬 또는 亦人齋이며 李壽五의 제 3자이다. 寧海 仁良里에서 태어났다. 1896년에 英陽 石保面 做士洞으로 이주하였고 『仁廬處士遺稿』가 전한다. 수취인인 李鉉命(1849~1902)은 자가 凝之이고 호가 澗翠이며 생부는 李壽五이고 다른 파로 멀리 양자를 가 李壽鶴의 후사가 되었다. 이현명의 맏며느리가 전주류씨이다. 서간에서 언급한 ‘査丈’은 柳膺鎬이다.
仁廬處士遺稿, 李鉉謨, 2003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