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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이현모(李鉉謨)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885.4777-20130630.0659257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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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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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현모, 이현명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작성시기 1885
형태사항 크기: 30.1 X 33.3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일월 재령이씨 인려후손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85년 이현모(李鉉謨) 서간(書簡)
1885년 8월 8일, 李鉉謨가 심부름꾼이 일으킨 일과 형이 형의 사돈가에 해야 할 처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친형인 李鉉命에게 보낸 편지이다. 형이 처음 효과를 본 처방을 구해서 쾌차하기를 바라였다. 조카 무리가 敏谷을 유람하고 시를 지은 것을 가상해 하였다. 元坡에서 만나는 일이 17일로 정해진 것을 곤란해 하였으며, 지난번 심부름꾼이 일으킨 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전하였다. 박곡[瓢谷]의 內行(부녀자의 행차)이 그믐날로 정해진 것을 흡족해 하였으며, 그때 兄이 반드시 査丈께 편지를 써서 자신에게로 허물을 돌리며 일의 경위를 분명하게 말하기를 권유하였다. 추신으로, 맏아이가 편지가 없는 것이 혹 이곳 때문인지를 물었으며 보내준 책자를 받았다고 했으며 밤에 호랑이를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김정민

상세정보

1885년 8월 8일에 李鉉謨가 심부름꾼이 일으킨 일과 형이 형의 사돈가에 해야 할 처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친형인 李鉉命에게 보낸 편지
1885년 8월 8일에 李鉉謨가 심부름꾼이 일으킨 일과 형이 형의 사돈가에 해야 할 처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친형인 李鉉命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를 받고서 형의 근력이 아직 며칠 움직일 정도는 됨을 알아서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형의 병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은듯하니 처음 효과를 본 처방을 반드시 구해서 쾌차하기를 바라였다. 조카 무리가 敏谷에 유람하고서 시를 지어 돌아온 사실에 대해 기특하다고 하였다. 舜七씨도 시를 지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하였다.
자신은 지난번의 병은 완전히 제거되었는데 지금 다시 瘴毒에 상하여 아픈 목으로 누워서 날을 보내고 있어 어른을 모시고 처자를 양육하는데 안전한 때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元坡에서 만나는 일이 17일로 정해진 것을 곤란해 하였으며, 지난번 심부름꾼이 일으킨 것이 그 때는 꺼리는 것이 많아 곤란이 되었는데 지금 확고하게 말을 한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미 몇 년이나 흘렀으니 한 달로 급하게 여길 수는 없고 하물며 본가가 일의 형세로 의탁하고 물러섰고 또 들으니 그 집에 4, 5일 동안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신의를 의심하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박곡[瓢谷]의 內行(부녀자의 행차)이 그믐날로 정해진 것을 흡족해 하였으며, 그때 兄이 반드시 査丈께 편지를 써서 깊이 자신에게로 허물을 돌리며 대략 일의 경위를 분명하게 말하여 밖으로 드러난 흠을 감출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다. 동서끼리 서로 만나는 일이 좋고 당연한 일이지만 100리에 떨어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여성의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집이 불안하므로 姪婦가 여름에 왔을 때 오히려 이곳에 한 번의 행차도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우리가 서로 가까이 지내며 선조의 훈계를 염두하며 문호를 보전할 것을 부탁하였다.
추신으로서 조각 종이를 구하지 못해 조카들에게 답을 못하는 것을 한탄스러워하였다. 맏아이가 편지가 없는 것이 혹 이곳 때문인지를 묻고 자신이 먼저 물어야 할지에 대해 물었다. 보내주신 책자를 잘 받았다고 하였다. 호랑이가 출몰하여 물린 사람이 있으니 어두울 때 조심하기를 부탁하였다.
뒷면에 낙서가 있다. “은하수 가을날 높고 시원한데[河漢高秋濶], 서리 바람 밤중에 맑게 부네[風霜半夜淸].”란 시구이다.
수취인인 李鉉謨(1853~1927)는 李鉉命(1849~1902)의 친동생으로 자가 景贊이고 호는 仁廬 또는 亦人齋이며 李壽五의 제 3자이다. 寧海 仁良里에서 태어났다. 1896년英陽 石保面 做士洞으로 이주하였고 『仁廬處士遺稿』가 전한다. 수취인인 李鉉命(1849~1902)은 자가 凝之이고 호가 澗翠이며 생부는 李壽五이고 다른 파로 멀리 양자를 가 李壽鶴의 후사가 되었다. 이현명의 맏며느리가 전주류씨이다. 서간에서 언급한 ‘査丈’은 柳膺鎬이다.
仁廬處士遺稿, 李鉉謨, 2003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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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85년 이현모(李鉉謨) 서간(書簡)

兄主前 答上書。

面不盡言。書不盡意。吾人爲懷。安得不深且苦哉。然一片心靈。
旣有以相照觸之者。則何必待書面而后盡也。望外便中。伏承
下字。伏讀審邇來。
老人候有動作勞頓之害。自是常添。而筋力尙有以堪數日之動。旋
喜旋慰心。而兄愼症。仍作吟苦。認是病勢。根未易除去故也。前
初見效之方。必另加求療。趁垂快疊之聞。如何。諸節又自保寧。
而侄輩敏谷之遊。甚奇壯哉。況兼有所得於咏歸者乎。此事之讓付渠
輩。誠可笑處也。更未知舜七氏僉益。連又日爲追逐。短長吟以樂
邪。歸伏衡次。每苦夢想之煩也。弟。向所謂餘根。今則快祛。而復
以感傷瘴毒。方噎煩。委臥度日。稟薄寄生。甚覺憐歎。奉率
更無全安時。亦是俯仰焦悶耳。元坡半程。何必以今十七牢定
也。前見一伻之起。尙以多諱爲難。今此斷斷爲說。弟料所未到處也。
旣至數年之久。則不可以一朔月爲急。而況本家以事勢托讓。而又
聞其家有四五日方痛者。使人疑信之地乎。瓢谷內行。以晦日爲送云。甚
合甚合。其行也。兄主亦必修書於査丈。深自引過。而畧爲發明之。以掩外疵
之求。如何如何。此前所說及處也。止不煩耳。娣姒相面。亦是好事當然。而
百里相坐之女子事。豈能如意容易乎。其家不安。故姪婦夏來。尙無一番行於
此地耳。吾徒今日相望。体念先訓。保全門戶之外。更何有哉。餘。
心慌手戰。不盡上。
乙酉 八月 初八日。弟 鉉謨 上。

片紙之艱。到底皆然。侄輩處無答。可恨。長兒無書。或亦由
於此耶。或必待我有問而后答耶。並下喩之。伏望耳。

冊子。依數領之耳。

虎患四聞。可怖。而此村亦有數人咬驚者。運也奈
何。日其曛。須防愼勿犯危。如何。
河漢高秋濶
風霜半夜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