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25일, 이만인이 여강서원의 통문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85년(고종 22) 4월 25일에 龍山 李晩寅(1834~1897)이 廬江書院의 통문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屛虎 兩論으로 구분하자면 李晩寅은 屛論이고 柳基鎬는 虎論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편지의 내용에서도 屛虎 兩論의 대립의 일면을 볼 수 있다. 李晩寅은 柳基鎬가 攷證書를 보내주어 이로 인하여 만일 의혹을 제거하고 깨뜨릴 수 있다면 모두 柳基鎬의 덕분일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攷證書란 일단 예컨대 三山 柳正源의 『易解參考』나 蘆厓 柳道源의 『退溪先生文集考證』, 東巖 柳長源의 『常變通考』 등의 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廬江書院의 모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에게 보낸 通文은 너무나도 자신들을 매도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자신들을 임금의 명을 어기고 인륜을 무시하는 죄과로 귀결시켰으니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하였다. 또 무슨 禍機를 조작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현재 숨을 죽이고 있다고 하였다. 끝으로, 考證하는 일은 가을에 만나서 논하자고 하였다. 李晩寅의 말에 虎論系의 首院的 위치에 있었던 廬江書院 측에 대한 깊은 불신감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병호시비는 1620년 이후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이 虎派와 屛派로 나뉘어 전개한 鄕戰이다. 1620년(광해군 12)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는 廬江書院을 건립하면서 종향자인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가운데 누구의 위패를 퇴계의 왼편에 둘지를 두고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虎溪書院[廬江書院]에 大山 李象靖을 배향하자는 논의가 발생하면서 병파와 호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병호시비는 계속 이어지다가 400년이 지난 최근에야 호계서원의 사당 복원사업을 계기로 경상북도 당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류성룡를 왼쪽, 김성일을 오른쪽에 종향하기로 합의하였다.
발급인 李晩寅은 자는 君宅, 호는 龍山이고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아버지는 李彙喬이다. 향리에서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며, 유교 경전 연구와 유림 활동을 하다가 만년에 繕工監監役을 지냈다. 저서로는 『龍山集』이 있다. 수신인 柳基鎬은 자는 鞏甫, 호는 石隱이고 본관은 全州, 본적은 安東이다. 조부는 柳鼎文이고, 부친은 柳致孝이며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인근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성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고 이후 평안북도 宣川으로 移配되었다.16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정리하여 4권 2책으로 남긴 『客日隨錄』과 유고로 6권 3책의 시문집인 『石隱集』이 전한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영남 지역의 鄕戰 중 하나인 병호시비의 일면목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병호시비는 당시 향촌의 미치는 영향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