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3월 청명일, 권연하가 상대 숙부의 사망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서적 간행에 따른 부조금을 보내는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84년(고종 21) 3월 청명일에 頤齋 權璉夏(1813~1896)가 상대 숙부의 사망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서적 간행에 따른 부조금을 보내는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의 숙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것에 대해 애통한 심정을 전하였다. 장례를 지낸 지 이미 몇 달이 지났다는 얘기를 듣고서, 남쪽을 바라보며 슬퍼하매 그저 눈물만 흘렸다고 하였다. 이어 喪中에 있는 상대 및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병증이 작년 겨울보다 심하여 거의 죽은 사람처럼 지내다가 봄을 맞아 비로소 啓蟄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형이 老患으로 불편하여 한 달 중에 같이 지낸 날이 거의 없다고 했고, 집안의 喪事가 거듭되는 가운데 일전에는 檢討하던 叔父의 喪을 당했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板校하는 일은, 지난번에 金溪에서 보낸 편지를 보았더니 2월 열흘 후에 시작한다고 하였는데 그 사이 이미 일을 끝마쳤는지 물었다. 또 이와 관련한 원근의 잡음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는지 물었다. 서적을 간행하는 일에 마땅히 힘을 보태야 하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다만 몇 緡銅을 보낸다고 하였다. 이는 추신에 다시 언급되어 있다. 또한 문중의 서너 집안에서 늘 이에 대해 논의를 꺼내는 이가 간혹 있으나 憂故로 인하여 상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비록 나중에 논의하더라도 조금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水谷의 祥期가 다가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손자를 보내어 그 편에 뵈게 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발급인 權璉夏은 자는 可器, 호는 頤齋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동안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1881년 스승의 문집인 『定齋文集』을 교감하였으며, 1882년 壽職으로 敦寧府 都正에 증직되었고, 1892년에 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저서로 『이재선생문집』 17권이 있다. 수급자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편지에 등장하는 죽은 숙부는 이 전해에 사망한 省軒 柳致厚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수취인은 石隱 柳基鎬인 듯하다. 柳基鎬은 자는 鞏甫, 호는 石隱이고 본관은 全州이다. 조부는 壽靜齋 柳鼎文이고, 부친은 柳致孝이다.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인근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성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었고 이후 평안북도 宣川으로 移配되었다. 16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정리하여 4권 2책으로 남긴 『客日隨錄』과 유고로 6권 3책의 시문집인 『石隱集』이 전한다.
이 편지는 19세기 유학자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19세기 기존의 체제와 가치가 도전을 받게 되자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새로운 학설들에 대해 반론을 펴는 한편 자신의 신념에 입각하여 후학양성에 노력하고 전통적인 미풍양속의 고취 및 전통적인 교육제도의 확충에 진력하였다. 이는 19세기 서원이나 사우에서 빈번히 講會를 개최하는 한편 조상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