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6월 22일, 이만운이 문집 간행 등과 관련하여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84년(고종 21) 6월 22일에 雙翠 李晩運(1815~1886)이 문집 간행 등과 관련하여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월초에 조카아이가 돌아온 편으로 상대의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 담긴 꼼꼼하고 정성스러운 뜻이 간절하였고, 상대가 자신을 잊지 않고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어, 상대와 아들의 안부를 묻고 특히 상대의 아들이 외모도 좋고 내면도 충실하니 장래에 크게 되지 않을까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상대의 조카이자 자신의 생질이 상대가 사는 곳과 가까운 곳으로 장차 분가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육십 년 동안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상대가 분부하고 의지할 바가 생기게 된 것에 대해 축하한다고 하였다. 자신은 애통한 심정이 더욱 자신을 쇠약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며, 정력도 약해져 병마와 대적할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다. 또한 여러 아우와 아이들이 각자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만, 큰 흉년 끝에 또 보릿고개를 지내면서 살 방도를 도모하느라 다른 데로 눈 돌릴 겨를이 없다고 하였다.
본론에서는, 스승의 원고는 이미 板校하였으나 아직까지 인출하지는 못하였다고 하면서, 간행을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상대가 春峽으로 問祥하러 가는 일이 차질이 없는지 물으며 편지를 마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스승의 원고는 柳致明의 『定齋集』을 의미하는 것 같으며 春峽 봉화 春陽을 의미한다.
발급인 李晩運은 자가 文五, 호는 雙翠이며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柳致明의 문인으로 아버지는 李彙廷이다. 1843년 생원에 합격하고 이듬해 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大司諫․ 吏曹 參議․ 漢城府右尹․ 慶州府尹․ 兵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875년 경주부윤 때의 일로 暗行御史의 모함을 입어 무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저서로는 『雙翠遺稿』가 전해진다. 수취인 柳基鎬는 자는 鞏甫이고, 호는 石隱이고 부친은 柳致孝이다.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인근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客日隨錄』와 『石隱集』이 있다.
이 편지는 영남 사림의 큰 인물의 문집을 간행할 때 많은 門人들이 공동으로 합심하여 일을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편지의 등장하는 李晩運과 柳基鎬는 모두 柳致明의 문인으로써 이 일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널리 유행하여 이 시기에 영남에서 많은 선조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