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7월 그믐날, 김형모가 지난번 文酒 모임에 대한 감회 및 桃園 모임의 뒷이야기와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84년(고종 21) 7월 그믐날에 柯山 金瀅模(1856~1930)가 지난번 文酒 모임에 대한 감회 및 桃園 모임의 뒷이야기와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일전에 山齋에서 뵈었던 일은 비록 여유롭게 강론하고 질의하여 평소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글 짓고 술 마시면서 단란하게 노닐었던 즐거움은 한 번의 좋은 일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하였다. 다만 그때 ‘世態雲雨’라는 구절은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거니와, 沈約의 「別范安成」 시의 "그대와 함께 늙은 지금 이 시절, 더 이상 헤어질 때 아니지[及爾同衰暮 非復別離時]."라는 구절에 담긴 회포와 주자의 제자인 李季章이 아직 젊음에도 작별을 슬퍼하였던 정과 같은 이별에 대한 유감이 없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때 상대가 城東에 머무르면서 비 때문에 지체되어 고생을 겪다가 湖上으로 가서 즐겁게 달구경을 하였다는 얘기를 듣고서, 한편으로는 슬펐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고도 하였다.
이어, 돌아간 뒤의 상대 및 주변 친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김형모 자신은 여러 해 동안에 부친과 떨어져 지내던 끝에 조석으로 문안을 올리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으니, 모두 임금의 은혜 덕택이라고 하였다. 다만 부친께서 요사이 사소한 건강 이상 증상을 보이셔서 매우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하였다. 그밖에 여러 사람들은 다행히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西山 金興洛 函丈께서 큰 병을 앓고 계신 것은 아니지만 몸을 수습하지 못하시는 상황에 대해 우려감을 표하였다.
이어 衣制가 번복될 기미가 있다고 하는데, 이 소식이 믿을 만한 것인지 물었다. 또한 도원의 모임에 老成들이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는 吾黨의 수치라고도 하였다. 일전에 川城의 2員이 와서 이곳에 묵다가 떠났는데 이와 관련하여 상대에게 유감을 두면서 결과의 책임을 모두 상대에게 떠넘겼다고 하였다. 이에 자신의 宗叔께서 그것의 불가함을 극구 말씀해 주셨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고 하였다.
발급인 김형모는 자가 範初이고, 호는 柯山이며, 본관은 義城이다. 金誠一의 후손으로, 부친은 雲圃 金景洛이다. 부인은 咸陽朴氏이다.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張錫英, 李相龍, 金時洛, 柳廷鎬, 柳淵楫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을 때, 안동 지역의 유림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였다. 『退溪書節要』 간행에 참여하였고, 스승의 문집 『西山集』 간행에도 참여하여 교정을 보았다. 소수서원과 고산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