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7월 6일, 이돈우가 구명 운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웅담을 구하는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84년(고종 21) 7월 6일에 肯庵 李敦禹(1807~1884)가 구명 운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웅담을 구하는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에 상대가 자신을 방문하겠다는 편지 내용을 보고 뚫어지라 쳐다보며 고대했지만 끝내 오지 않았으므로 매우 섭섭했다고 하면서, 일간에 상대가 또 府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한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이어, 밖에 나와 있는 상대의 안부를 묻고 아울러 모임이 원만했으며 논의는 어떠하였는지 물었다. 이돈우는 이 일로 오랫동안 생각만 허비하고 좋은 방도를 끝내 얻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는 擧幡(구명 운동)도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하였는데, 營門에 나아가 하소연하더라도 관찰사가 반드시 유림의 청을 따라 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없고 中道와 下道의 여러 고을에서는 거의 變服하였다고 하니 이와 같이 분열된 상황에서 관찰사가 유림의 의견을 경청하겠느냐고 하였다. 아마도 서원 복설이나 그밖에 다른 일로 營門에 구속된 유생을 구명하기 위한 방법을 두고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이번 행차로 인하여 짧게나마 자신을 방문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돈우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한결같이 차도가 없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가까운 지방의 經驗方에 대해 들었더니 웅담이 가장 좋은 약제인데 4, 5전을 복용하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는데 杆城(杆城郡守 洗山 柳止鎬를 가리킴) 집에는 혹 있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父子가 모두 부재중인 상황이니, 상대가 있는지 없는지를 元直(修齋 柳廷鎬)에게 탐문해서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끝으로, 板校를 이미 마쳤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印出하고 나서 책으로 제작하고 告成(文集告成)하는 것은 언제쯤 하느냐고 물었다.
발급인 이돈우는 본관이 韓山으로, 자는 始能, 호는 肯庵이다. 아버지는 秀應이고, 大山 李象靖의 高孫이다. 그런데 壺谷 柳範休의 아들인 柳魯文이 이상정의 아들인 李埦(이돈우의 증조부)의 막냇사위였기 때문에, 이돈우에게 류노문(곧 류기호의 伯祖)은 大姑母夫가 된다. 이돈우와 류기호는 이런 戚分이 있는 데다, 모두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서 서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 편지의 수신자도 류기호일 것으로 보인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