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8월 9일, 이돈우가 문집 간행 등과 관련하여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84년(고종 21) 8월 9일에 肯庵 李敦禹(1807~1884)가 『定齋集』 완간 등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돈우는 류기호가 先師인 柳致明의 문집 곧 『정재집』을 보내준 것에 대해서 다행스런 마음을 전하고 아울러 류기호의 정성을 치하하였다. 일반적으로 『정재집』은 류치명의 아들 柳止鎬와 이돈우 ․ 權璉夏 ․ 金興洛 등이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 ․ 편차하여 1883년 안동 龍潭寺에서 초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그 초간본이라는 것이 이 무렵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집 간행에 진력했던 류기호의 노력도 살필 수 있다.
이어서 8월도 이미 초순이 되어 류기호의 亞庭(숙부)의 小祥이 다만 보름 남았으므로, 류기호의 비통한 심정이 편지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류기호의 숙부 가운데 안동 座首를 지냈던 省軒 柳致厚가 1883년(고종 20) 8월 25일에 사망했던 일과 관련된 것이다. 이돈우는 가을에 병이 차도를 보이는 듯하였으나 움직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근래 사위를 맞는 데에 불편하여 산에서 내려와 집안에서 지내기도 한다면서, 산수와 벗하는 즐거움 따위는 없다고 심경을 나타냈다. 『肯庵集』 연보에 따르면, 이돈우는 이해 여름에 風祟를 치료하기 위해 山亭에 기거한 바 있다.
이어 道疏를 올리는 일에 대한 류기호의 견해가 어떠한지 듣고 싶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자신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상황(자신의 吏曹參判 임명, 李象靖의 追(加)贈을 포함한 그 先世에 대한 追贈 조치 등)에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 진달할 생각이었으나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만두었는데, 류기호의 정당한 의견을 받아들여 조치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흉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봄에 죽지 못한 것이 오히려 큰 불행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때에 君燮(편지에는 燮君이라고 되어 있음. 萬山 柳致儼의 아들인 柳永鎬의 字)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면 망령된 것이라고 하였다. 고향을 지키면서 貧賤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하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서 만류하면 들으려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끝으로 문집의 제작 상태에 대해 만족감을 표하고,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발급인 이돈우는 본관이 韓山으로, 자는 始能, 호는 肯庵이다. 아버지는 秀應이고, 大山 李象靖의 高孫이다. 그런데 壺谷 柳範休의 아들인 柳魯文이 이상정의 아들인 李埦(이돈우의 증조부)의 막냇사위였기 때문에, 이돈우에게 류노문(곧 류기호의 伯祖)은 大姑母夫가 된다. 이돈우와 류기호는 이런 戚分이 있는 데다, 모두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서 서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돈우는 1850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 ‧ 典籍 ‧ 校理 ‧ 刑曹參議 ‧ 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肯庵集』이 전한다. 道疏를 비롯해서 편지에 언급되고 있는 사항은 李敦禹와 柳基鎬의 문집 및 관련 기록을 보다 구체적으로 참조해야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