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0월 27일, 이돈우가 서적 제작자를 소개하는 일 등과 관련하여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83년(고종 20) 10월 27일에 肯庵 李敦禹(1807~1884)가 서적 제작자를 소개하는 일 등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돈우는 근래 자신이 더욱 쇠잔해진 것이 아침저녁 끼니를 오랫동안 제때 잇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팔십 줄에 있으면서 무한한 고초를 다 겪고 있으니 진실로 가슴 아프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을의 흉년 상황이 자신의 상황보다 더욱 심하여 눈앞에 굶주린 사람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 나라의 백성들은 구제할 수 없더라도 다만 50명에 불과한 同堂을 살릴 계책이 없으니, 이러고도 자신을 한 집안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자괴감을 표하였다.
이어 義城의 金德淳이라는 자가 印粧(서적 인쇄 제작)에 능통하고 또 자신과 평소 만나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가 지금 류기호 쪽으로 갔으니 잘 대접해주고 일거리를 나눠달라고 부탁하였다.
끝으로, 아들이 오늘 溪南에 갔을 거라는 소식을 전하고, 선대의 亭子와 관련된 일로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로 한 번 왕림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발급인 이돈우는 본관이 韓山으로, 자는 始能, 호는 肯庵이다. 아버지는 秀應이고, 大山 李象靖의 高孫이다. 그런데 壺谷 柳範休의 아들인 柳魯文이 이상정의 아들인 李埦(이돈우의 증조부)의 막냇사위였기 때문에, 이돈우에게 류노문(곧 류기호의 伯祖)은 大姑母夫가 된다. 이돈우와 류기호는 이런 戚分이 있는 데다, 모두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서 서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돈우는 1850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 ‧ 典籍 ‧ 校理 ‧ 刑曹參議 ‧ 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肯庵集』이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