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0월, 이돈우가 서적을 追刊하는 일과 관련하여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83년(고종 20) 10월 어느 날에 肯庵 李敦禹(1807~1884)가 서적을 追刊하는 일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류기호가 왕림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운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비바람이 친 뒤 추워진 날씨 속에 상중에 있는 류기호의 안부를 물었는데, 류기호의 숙부인 省軒 柳致厚가 이해 8월 25일에 졸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돈우는 위로드릴 말씀이 없다며 애도의 뜻을 표하고, 堂內 여러 사람의 안부도 물었다. 이돈우 자신은 계속되는 衰症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다고 하였고, 부진한 작황으로 인한 깊은 우려감을 표하였다.
지난번에 새기지 못한 목판을 근래 愚亭(晩愚亭)에서 追刊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사실인지 물었다. 반드시 이렇게 처리한 이후에야 마감할 날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고, 衆論이 歸一되기를 기다리고자 했다면 기약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지난번 모임에서 繼孟(西山 金興洛) 및 元振(平泉 李{王+集})과 대략 말한 것이 있는데 지금 이 소식을 들으니 이른바 따로 도모하지 않아도 의견이 합치된 경우라고 하였다. 追刊 운운한 것은 柳致明의 문집인 『定齋集』과 관련된 일로 보인다. 요사이 구설수에 올라 머리를 들지도 못하게 하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기미의 일을 신밀하게 하지 않으면 해가 된다.[幾事不密則害成]"는 聖人의 경계를 유념하기를 당부하였다.
끝으로, 갑자기 제기된 陞廡論이 다소 조급하게 추진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였다. 승무론은 안동에서 退溪의 嫡傳으로 인식되던 柳成龍 ․ 金誠一 등을 文廟에 從祀하는 것과 관련된 논의로 보인다.
발급인 이돈우는 본관이 韓山으로, 자는 始能, 호는 肯庵이다. 아버지는 秀應이고, 大山 李象靖의 高孫이다. 그런데 壺谷 柳範休의 아들인 柳魯文이 이상정의 아들인 李埦(이돈우의 증조부)의 막냇사위였기 때문에, 이돈우에게 류노문(곧 류기호의 伯祖)은 大姑母夫가 된다. 이돈우와 류기호는 이런 戚分이 있는 데다, 모두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서 서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돈우는 1850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 ‧ 典籍 ‧ 校理 ‧ 刑曹參議 ‧ 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肯庵集』이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