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3월 16일, 이돈우가 의식의 날짜를 정하는 일과 관련하여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83년(고종 20) 3월 16일에 肯庵 李敦禹(1807~1884)가 儀式의 날짜를 잡는 일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류기호와 그의 숙부 省軒 柳致厚의 안부를 묻고, 從氏 집안의 흉사 및 君燮(柳永鎬)의 高川에서의 일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물었다. 특히 杆城(杆城郡守로 재직하던 洗山 柳止鎬를 가리킴)이 喪妻한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류지호는 坦窩 金鎭華의 딸인 義城金氏를 잃은 데 이어 다시 맞은 達城徐氏를 3월 12일에 잃었다. 이돈우 자신은 죽을 날이 머지않다고 생각될 정도로 餘症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大禮에 대해서 날로 조급한 마음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돈우는 大禮의 날짜를 정하는 데 있었던 그간의 논란에 대해 언급하고, 결국 5월 7일로 날짜를 고쳐 정했다고 하였다. 또한 元佐(류지호의 字)에게 편지로 이를 알려서 속히 의논하여 통보하게 하였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지금 시점에서 道內에 통고하는 것도 시급하므로, 논의를 탐문하여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物資 문제로 연소배들을 下道로 보내려는 계획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肯庵集』 연보에 따르면, 이해 4월에 이돈우가 焚黃禮를 행하였는데, 이 편지에서 언급된 大禮는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발급인 이돈우는 본관이 韓山으로, 자는 始能, 호는 肯庵이다. 아버지는 秀應이고, 大山 李象靖의 高孫이다. 그런데 壺谷 柳範休의 아들인 柳魯文이 이상정의 아들인 李埦(이돈우의 증조부)의 막냇사위였기 때문에, 이돈우에게 류노문(곧 류기호의 伯祖)은 大姑母夫가 된다. 이돈우와 류기호는 이런 戚分이 있는 데다, 모두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서 서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돈우는 1850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 ‧ 典籍 ‧ 校理 ‧ 刑曹參議 ‧ 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肯庵集』이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