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11월 8일, 柯山 金瀅模가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근황을 전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82년(고종 19) 11월 8일에 柯山 金瀅模(1856~1930)가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근황을 전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한 번 상대를 뵙는 것을 상대가 韶州(義城인 듯함)에 구속되어 있던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에 하루도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나 끝내 찾아가지 못했으니, 비록 병 때문이라고 스스로 변명한들 어찌 상대의 이해를 바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일전에 春坡 族君인 金龍洛이 가셨던 일을 자신이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에 그 편에 편지로 인사드리는 것도 하지 못하였으니, 너무나 죄송했다고 하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 평소와 다름없이 상대의 기력이 건승하였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평소 상대가 수양한 힘을 증험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 주변 친족 등의 안부를 물었다.
金瀅模는 상대가 겪었던 횡액은 퇴폐한 世道 탓으로 돌리고 뒤미처 慨然해 할 것도 없지만, 吾黨의 後生들이 도무지 善을 행하는 데에는 나태하니 儒學界의 일대 액운이라고 하였다. 金瀅模 자신은 본래부터 병이 많은데 이번 겨울에는 기력이 빠짐을 더욱 느끼겠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얼굴 부위 종기와 독감에 대해 언급하면서, 편지의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여러 번 인사를 드리고자 마음먹었으나 그만두고 말았던 것이 이와 같은 實病에 따른 것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막내가 돌아온 지 막 며칠이 지났고 老親께서도 이어서 돌아오실 듯한데, 갑작스런 추위가 이와 같으니 매우 애가 탄다고 하였다. 金瀅模는 자신의 身病이 고질병이 되어 가고 갖가지 불쾌한 일이 많이 생겨서 본분상의 사업에 두서가 없으니 이것도 운명이라고 하였다. 從兄도 예식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날마다 분주하게 지냈으나 끝내 지나치게 간소하게 처리하였으니, 비록 실정을 살펴 용서해 주시더라도 부끄럽다고 하였다.
편지 본문에서 구속 운운한 것으로 보아 수신자는 石隱 柳基鎬(1823~1886)일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64년(고종 1)에 臨川書院의 사액을 청하는 일로 상소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데 이어, 1870년 겨울에 임천서원 청액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었다. 또한 1881년 영남만인소가 일어나고 李載先 사건이 일어나자 嶺儒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수배되었고, 이해에는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885년에도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