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1월 7일, 李文稷이 근황을 전하고 고을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77년(고종 14) 1월 7일에 靜村 李文稷(1809~1877)이 근황을 전하고 고을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해 12월에 상대가 보내준 답장에 대하여, 든든한 長城과도 같았던 원로가 돌아가시고 마음 둘 곳이 없던 상황에서 자신이 의지할 만한 곳이 있게 된 것만 같았다고 하면서, 일반적인 안부편지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元朝의 혹독한 추위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 喪中에 있는 상대 및 상대의 亞庭(숙부)과 同堂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상을 당한 哀從의 심정에 대해 대략 알만 하다고 하면서, 그가 병이 나지 않았으면 다행이나 어찌 그러기 쉽겠느냐고 하였다. 흉년 구제의 행정에 대해 이미 區劃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3월 그믐 이전에 무슨 역량이 있어 이러한 큰 사업을 마련할 수 있었냐고 하면서 존경심을 표하였다.
李文稷 자신은 연말연시에 우환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위로는 大家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從姪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한 해를 마칠 대책이 없었다고 하였다. 앞에 닥친 생계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新正을 맞은 형편도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몹시 가난한 魯나라에 비기고 상대는 부유한 衛나라에 비기기도 하였다. 어제는 또 致祥을 哭하였다고 하면서 비참한 마음을 전하고, 아울러 그의 평소 훌륭한 행실과 해박한 지식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하였다.
고을의 일은 너무 경솔히 제기하였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鄕內에서 거둔 돈을 監營에 올리지 않는다면 從兄이 앞장서고 李文稷 자신이 호랑이 꼬리를 잡았던 것이 모두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도 하였다. 鄕所가 行公하게 되면 통문을 돌려 府에서 모임을 가져서 끝을 볼 생각이라고 하면서,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내막을 모르는 자들이, 왕왕 자신들이 아전들의 손에 이미 농락을 당하였다고 조롱한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가소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李文稷은 이번 일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役力이 과중해지고 名分이 문란해질 뿐만 아니라 奠居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현재 社還을 급하게 독촉 받고 있다고 하면서, 이는 하나의 큰 액운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진 수령이 나타나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하였다. 끝으로, 高山書院에서 모이는 일은 상대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 조만간 다시 통보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