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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877.4717-20130630.01032570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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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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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문직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77
형태사항 크기: 22.8 X 43.2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박실 전주류씨 수정재고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7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1877년 1월 7일에 이문직이 근황을 전하고 고을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지난해 상대방이 보내준 답장은 마음 둘 곳이 없던 자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하면서, 보통의 안부편지와는 견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추위가 혹독한 때에 상중에 있는 상대방과 여러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상을 당한 심정에 대해 대략 알만 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흉년을 구제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3월 그믐 전에 이렇게 큰일을 계획할 수 있는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표하였다. 자신은 연말에 위아래로 우환이 많아서 생계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새해의 형편이 참담하다고 하였다. 어제 치상을 곡한 슬픈 마음을 전하고, 고을의 일을 경솔히 제기한 일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하였다. 향내에서 거둔 돈을 감영에 올리지 않는다면 앞장서서 일한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통문을 돌려 부에서 모임을 가질 생각이라고 하면서, 이번 일이 해결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지금 환곡을 독촉 받고 있는데, 어진 수령이 나타나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끝으로 고산서원에서 모이는 일은 조만간 다시 통보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서진영

상세정보

1877년 1월 7일, 李文稷이 근황을 전하고 고을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77년(고종 14) 1월 7일에 靜村 李文稷(1809~1877)이 근황을 전하고 고을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해 12월에 상대가 보내준 답장에 대하여, 든든한 長城과도 같았던 원로가 돌아가시고 마음 둘 곳이 없던 상황에서 자신이 의지할 만한 곳이 있게 된 것만 같았다고 하면서, 일반적인 안부편지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元朝의 혹독한 추위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 喪中에 있는 상대 및 상대의 亞庭(숙부)과 同堂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상을 당한 哀從의 심정에 대해 대략 알만 하다고 하면서, 그가 병이 나지 않았으면 다행이나 어찌 그러기 쉽겠느냐고 하였다. 흉년 구제의 행정에 대해 이미 區劃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3월 그믐 이전에 무슨 역량이 있어 이러한 큰 사업을 마련할 수 있었냐고 하면서 존경심을 표하였다.
李文稷 자신은 연말연시에 우환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위로는 大家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從姪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한 해를 마칠 대책이 없었다고 하였다. 앞에 닥친 생계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新正을 맞은 형편도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몹시 가난한 魯나라에 비기고 상대는 부유한 衛나라에 비기기도 하였다. 어제는 또 致祥을 哭하였다고 하면서 비참한 마음을 전하고, 아울러 그의 평소 훌륭한 행실과 해박한 지식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하였다.
고을의 일은 너무 경솔히 제기하였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鄕內에서 거둔 돈을 監營에 올리지 않는다면 從兄이 앞장서고 李文稷 자신이 호랑이 꼬리를 잡았던 것이 모두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도 하였다. 鄕所가 行公하게 되면 통문을 돌려 府에서 모임을 가져서 끝을 볼 생각이라고 하면서,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내막을 모르는 자들이, 왕왕 자신들이 아전들의 손에 이미 농락을 당하였다고 조롱한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가소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李文稷은 이번 일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役力이 과중해지고 名分이 문란해질 뿐만 아니라 奠居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현재 社還을 급하게 독촉 받고 있다고 하면서, 이는 하나의 큰 액운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진 수령이 나타나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하였다. 끝으로, 高山書院에서 모이는 일은 상대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 조만간 다시 통보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7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靜村
省式。客臘惠覆。滾滾情悃。若可以擗
寒生溫。吾輩近日東望懷緖。不但失却
長城。後死傷痛。殆無以寄心。奉書來
隱然有倚賴處。此豈尋常往復寒暄字
比耶。歲且新矣。而元朝毒寒。似成灾眚。不
審履端
服履啓處崇深。
亞庭體候。同堂各節。保無愆違。哀
從情界。略可想得。而不至生疾。則幸矣。
然何易也。荒政聞已區劃。三海以前。有
何力量。能辦得此大事業也。不覺起敬歎
美也。弟。餞迎只增憂惱二字。上自大家。下
至群從侄。都無卒歲之策。正元光景。
不覺慘然。前頭契活。姑不暇計。而目下爻象。
已令人羞憤。何敢以魯之殘落。比擬於衛國富
厚耶。昨又哭致祥。如五六日之病。不但其錯地慘愕。念
渠一生經歷。腹笥所蘊。俱爲痛惜不自堪耳。鄕事。
已恨其輕發之辱。何可復有云云。而令兄已見之辱。無地
可雪。鄕內已收之錢。不爲呈營。則從兄之首唱。弟之執虎
尾。俱無下落。方待
鄕所行公。擬欲輪通。
一鄕會府。爲成終之
計。未知誰有能向
合者否。似聞不知者。
往往以弟輩。已臥於吏
手爲誚云。良覺可笑。
然此事不結。則不徒
役力之重。名分之紊。
似無奠居之勢。豈非
可憂可憤者耶。目今
社還如火督。此亦一大
厄會。何處更得來慈
惠之倅。以奠安哉。
會事。所示誠然。當
俟早晩更通計耳。餘。喪擾中不
宣只此。伏惟
照亮。謹謝狀。
丁丑元月初七。弟 李文稷。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