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5월 5일, 김헌락이 근황을 전하고 장례 불참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77년(고종 14) 5월 5일에 慵庵 金獻洛(1826~1877)이 근황을 전하고 장례 불참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오랫동안 상대를 그리워하던 상황에서 상대가 자신을 보러 오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간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服中에 있는 상대 및 가족 등의 안부를 물었다. 김헌락 자신은 딸의 병이 겨우 나았지만 아이들의 돌림병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다면서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였다. 지금의 상황이 날마다 놀라운 일들이 생겨나니, 차라리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되는 게 낫겠다고 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우 雲圃 金景洛(1834∼1912)이 평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근래 받았으나, 아직까지 귀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大宅의 葬禮가 정확히 언제 있는지 묻고, 大緬이 중지되고 새 무덤을 마련하는 것도 다른 곳으로 정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물었다. 澗亭의 常事가 임박하니 더욱 애통하지만 葬事와 딸아이 송별로 인하여 조문하러 갈 여가가 없다고 하였다.
발급인 김헌락은 자가 仲賢이고, 호는 慵庵이다. 본관은 義城이다. 鶴峰 金誠一의 후손으로, 부친은 金鎭右이고, 모친은 壽靜齋 柳鼎文의 딸 全州柳氏이다. 부인은 李秀應의 딸 韓山李氏이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이 내려져 臨川書院이 훼철되자, 서울로 올라와 다시 서원을 열 수 있기를 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강원도 金城, 현 金化郡 金城面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성리학 서적과 『大山集』 등을 탐독하며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저서로 『金溪誌』,『遊錄』, 『龍巖遺稿』 등이 전한다. 『금계지』는 경상북도 안동 금계에 대한 洞誌로, 향약의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록』은 유배지에서 사면되어, 귀향하던 중 금강산을 유람하며 기록한 글이다.
편지 가운데 나오는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우인 김경락은 자가 五衍이고, 호는 雲圃이다. 西山 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4년(고종 11) 증광시 생원 3등 42위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던 중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귀향하였다.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후학 양성에 힘썼다. 스승 김흥락이 죽자 講會의 主席을 맡았다. 안동의 유림이 安東鄕廳의 좌수로 추대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雲圃集』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