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3월 28일, 김헌락이 류긍호의 상사와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76년(고종 13) 3월 28일에 慵庵 金獻洛(1826~1877)이 柳肯鎬의 상사와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新昌 형님께서 사망한 일에 대해 비통한 심정을 전하였다. 歲前에 平里에서 함께 밤을 보낼 때에 그의 병증이 과연 가볍지 않게는 보였으나 혈색으로 보아 위급한 병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心界가 이와 같고 벼슬길도 잘 풀리고 있어서 명이 단축될 상은 아닌 줄 알았는데, 헤어지던 날의 정이 담긴 말이 영영 이별하는 말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느냐고 하였다. 세간의 영욕과 수명의 장단에 관한 이치는 이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金獻洛 자신은 유람을 위해 武陵에 갔다가 갑자기 부음을 듣고서 지레 돌아왔다고 하였다.
끝으로, 신창의 吏卒을 갑작스러운 사이에 동원하여 운구할 길이 없으나 늦어도 내달 열흘 전에는 시신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九潭에서 迎哭할 수 있도록 날짜에 대해 듣거든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창 형님은 博羅 柳肯鎬를 가리킨다. 1866년 프랑스가 전함 5척을 몰고 강화도를 습격해 왔을 때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했다가 총융청 참모로 차출한 바 있다. 그는 이듬해 戰功에 대한 特進으로 군자감 봉사에 임명되고, 직장과 판관 등을 거쳐 주부에 올랐으며, 1874년에는 신창 현감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이 무렵 任所에서 사망하였다.
발급인 김헌락은 자가 仲賢이고, 호는 慵庵이다. 본관은 義城이다. 鶴峰 金誠一의 후손으로, 부친은 金鎭右이고, 모친은 壽靜齋 柳鼎文의 딸 全州柳氏이다. 부인은 李秀應의 딸 韓山李氏이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이 내려져 臨川書院이 훼철되자, 서울로 올라와 다시 서원을 열 수 있기를 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강원도 金城, 현 金化郡 金城面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성리학 서적과 『大山集』 등을 탐독하며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저서로 『金溪誌』,『遊錄』, 『龍巖遺稿』 등이 전한다. 『금계지』는 경상북도 안동 금계에 대한 洞誌로, 향약의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록』은 유배지에서 사면되어, 귀향하던 중 금강산을 유람하며 기록한 글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