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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875.4717-20130630.010325700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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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문직, 류기호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75
형태사항 크기: 18.1 X 5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박실 전주류씨 수정재고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5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1875년 3월 29일에 이문직이 근황을 묻고 서원의 재정적인 문제로 방문을 청하기 위해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덕명이 당한 상사는 더욱 슬프고 근심스러운데 兩喪의 장례를 모두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평안하게 지내는 날이 없다고 하였다. 고산서원의 전답을 소작하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이에 대해 속히 류기호를 모시고 와서 처리하고 싶지만 그곳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여 지금에야 사람을 보낸다고 하면서, 혹 잠시 왕림하는 데에 애로가 없는지 물었다. 이후 내용에서도 서원의 재정 및 서적 간행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고, 다만 류기호 측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촉구하고 류기호의 방문을 청하는 내용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

상세정보

1875년 3월 29일, 이문직이 근황을 묻고 서원의 재정적인 문제로 방문을 청하기 위해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75년(고종 12) 3월 29일에 靜村 李文稷(1809~1877)이 근황을 묻고 서원의 재정적인 문제로 방문을 청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안부 인사 부분에서는, 특히 敬心이 喪妻한 일은 너무나 비통한 것인데 더구나 그 부친이 아주 먼 곳에서 사망한 것은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편지의 발급연도와 관련해서 보면 이해 3월 15일에 부인 義城金氏를 잃은 水村 柳淵博의 일을 가리키는 듯하나 확신할 수 없다. 이어 우거하고 있는 活塘의 근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문직이 지난번에 조금 부조하였던 것은 함께 아껴주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류기호 측에서도 그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의 눈병의 차도가 어떠한지 묻고, 염려스러운 마음을 표하였다.
이문직 자신은 집안의 우환거리로 인하여 너무나 근심하고 지낸 지가 거의 달포가 되었는데 근래 다행히 조금 괜찮아졌다고 하였다. 德明이 당한 喪事는 더욱 슬프고 근심스러운데 兩喪의 장례를 모두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평안하게 지내는 날이 없다고 하였다.
高山書院의 전답을 소작하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이에 대해 속히 류기호를 모시고 와서 처리하고 싶지만 그곳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여 지금에야 사람을 보낸다고 하면서, 혹 잠시 왕림하는 데에 애로가 없는지 물었다. 이후 내용에서도 서원의 재정 및 서적 간행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고, 다만 류기호 측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촉구하고 류기호의 방문을 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문직은 자가 法祖, 본관은 韓山으로 所庵 李秉遠의 손자이다. 훼철된 臨川書院의 복설을 청하는 상소의 疏頭로 활약하였다가 興德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疏色을 맡았던 류기호金化로 유배된 바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5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石舍 經座 入納。

相別已久。相戀又可斗耶。比日來稍
溫。謹候
經味益淸重。咸君侍學佳祐。
堂內僉節一安否。敬心喪耦。極爲
悲怛。況其大人之千里惡報。◘所堪忍
耶。活塘寓履何如。經過之艱。已無可
論。而退舍一款。已爲還覓耶。向來此中
之些少添助。亦出於同愛之道。而要之。
僉座亦不少緩於奠安之方。且其司視
添歇何如。今世隻眼。更無他人。尤爲
之慮慮不已耳。服弟。中間爲家間憂
虞。極費憂思者殆月餘。而近幸少可。
德明從喪慘。又爲悲瘁中。兩喪皆卜
窆埋。便無鎭安之日。奈何。高山作民。
聞尙有未來者。其中金云。而已來者皆
付。日伊永述兩漢。似無斷落之。甚
欲趁時奉邀。爲區處地。而其處痘故
大熾。今纔起伻。或無拘掣暫枉
否。正會時。略有分㨂者。皆無乍落。此
中所捧。亦一味退托云。如此而何能有爲
耶。但貴中亦以鎖鎖。而誼不欲正言。則
從此無防限可商示。不但本所之日就蕩
然。僉兄之一齊驅之以本家之責者。豈
非可寃耶。猶有少憚。在貴中僉口。而
今無可恃矣。弟所云云。聞又減事考之
文以傅如此。則亦無奈何。而一段營度。在
未死前。庶可爲剞劂之役矣。今果如
此。則便植松看亭。索之亦何益耶。所以
不欲覓出。猶俟兄以出後。可以議爲耳。
餘萬都留。不宣狀。
乙亥 三月 卄九。弟 文稷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