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3월 29일, 이문직이 근황을 묻고 서원의 재정적인 문제로 방문을 청하기 위해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
1875년(고종 12) 3월 29일에 靜村 李文稷(1809~1877)이 근황을 묻고 서원의 재정적인 문제로 방문을 청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편지이다.
안부 인사 부분에서는, 특히 敬心이 喪妻한 일은 너무나 비통한 것인데 더구나 그 부친이 아주 먼 곳에서 사망한 것은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편지의 발급연도와 관련해서 보면 이해 3월 15일에 부인 義城金氏를 잃은 水村 柳淵博의 일을 가리키는 듯하나 확신할 수 없다. 이어 우거하고 있는 活塘의 근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문직이 지난번에 조금 부조하였던 것은 함께 아껴주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류기호 측에서도 그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의 눈병의 차도가 어떠한지 묻고, 염려스러운 마음을 표하였다.
이문직 자신은 집안의 우환거리로 인하여 너무나 근심하고 지낸 지가 거의 달포가 되었는데 근래 다행히 조금 괜찮아졌다고 하였다. 德明이 당한 喪事는 더욱 슬프고 근심스러운데 兩喪의 장례를 모두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평안하게 지내는 날이 없다고 하였다.
高山書院의 전답을 소작하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이에 대해 속히 류기호를 모시고 와서 처리하고 싶지만 그곳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여 지금에야 사람을 보낸다고 하면서, 혹 잠시 왕림하는 데에 애로가 없는지 물었다. 이후 내용에서도 서원의 재정 및 서적 간행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고, 다만 류기호 측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촉구하고 류기호의 방문을 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문직은 자가 法祖, 본관은 韓山으로 所庵 李秉遠의 손자이다. 훼철된 臨川書院의 복설을 청하는 상소의 疏頭로 활약하였다가 興德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疏色을 맡았던 류기호도 金化로 유배된 바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