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2월 28일, 慵庵 金獻洛이 아들의 거취와 관련하여 도움을 구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74년(고종 11) 2월 28일에 慵庵 金獻洛(1826~1877)이 아들의 거취와 관련하여 도움을 구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雲泥에 차이가 있고 또 우환거리로 인하여 오랫동안 안부편지를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자신의 그리운 마음은 늘 간절했다고 하였다. 雲泥란 ‘한 사람은 하늘 위의 구름에 올라타고, 한 사람은 땅 위의 진흙탕을 밟고 다닌다.[乘雲行泥]’란 뜻으로, 두 사람의 지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이 편지의 仕體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金獻洛은 일반인이고 상대인 外從兄은 관직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이어 벼슬하고 있는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어제 길에서 高川 사람을 만나서 外從兄 식구들 및 同堂 여러분들이 평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흉년 근심이 백척간두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서 상대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방 수령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나 아직까지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답답한 심정을 전하였다.
金獻洛은 자신의 아들이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도중에서 전염병에 걸려 모두 40여 일 동안 위독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고, 이로 인하여 열여섯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피접하다가 12월 말에야 비로소 다 모일 수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막내아우 집 둘째조카가 돌림병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수십 여 일 동안이나 고생하였고 小嬌도 현재 위독하다고 하면서, 자신이 鐵腸과 石心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거의 버텨낼 재간이 없다고 하였다. 더구나 자신의 아들이 반년 동안이나 소생하지 못하다가 근래 들어 약간 좋아지기는 하였으나 편안하게 지내면서 調息하여 건강해지기를 기다려야 하는데도 현재 聞齋僧(재 들은 중, 바라던 일을 하게 되어 신이 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애비로서 그를 말릴 힘이 없다고 부끄러운 마음을 표하였다. 끝으로, 金獻洛은 이 일과 관련하여 外從兄께서 직접 와 주어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壽靜齋 柳鼎文의 사위로 承旨 金鎭右가 있다. 金鎭右는 全州 柳氏와 혼인하여 慵庵 金獻洛과 雲圃 金景洛, 義城 金氏(大溪 黃在英의 처)를 낳았다. 따라서 金獻洛은 全州 柳氏 집안의 외손이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