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2월 23일, 이만각이 장례 도구 마련 및 재취 등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72년(고종 9) 2월 23일에 愼庵 李晩慤(1815~1874)이 장례 도구 마련 및 재취 등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번에 만나서 정담을 나누었던 일은 비록 혼란하고 바쁜 와중에 있었으나 지난 몇 해 동안 그리워했던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별한 뒤에 한결같이 그리움으로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어제 상대 從叔 어르신의 편지를 받았더니 곧 李晩慤의 從叔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고 하였다. 요사이 상대 집안의 여러분들이 괴로워하며 지냈던 이유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니, 놀랍고 황망한 와중에 부끄러운 마음까지 더해진다고 하였다. 이어 상대가 지난번에 앓았던 감기가 나았는지 안부를 묻고, 彛兄이 여행 중에 병을 얻어 돌아간 일에 대해서 매우 우려했었는데 어제 자신이 받은 편지에서 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었으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고도 하였다.
부탁받은 壽具를 찾아내기는 하였으나 볼품이 없으므로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 생질들의 힘을 빌려 마련하여 本家에서 훗날 조치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였다. 조카들을 가게 하였으나 모두 사리에 어두운 애들이라고 하면서, 곁에서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再娶하는 일은, 방금 전에 金溪에서 보낸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閑基의 盧氏 집안에서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하여 剛儀를 보내고 봄에 성혼하기로 다시 약속하였는데, 형편이 군색하여 걱정이라고 전하였다. 추신에서는, 盧氏가 곧 蘇齋 盧守愼의 형님 집안이라고 밝혔다.
발급인 李晩慤은 자가 謹休, 호는 愼庵이고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柳致明․ 李秉遠의 문인으로 1865년 朴珪壽의 추천으로 繕工監 假監役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李滉과 奇大升 간에 있었던 ‘四七理氣論’을 발전시켰고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저서로는 『巖后類記』․ 『愼庵集』 등이 전해진다. 이 편지의 수급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李晩慤은 딸 셋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녀가 石下 柳建鎬의 아들인 柳淵愚에게 시집을 갔다. 따라서 수신자는 柳建鎬일 것으로 보이나 확신할 수 없다. 또한 壽靜齋 古宅과 관련지어 보면, 수신자가 石隱 柳基鎬(1823~1886)일 가능성도 크다.
이 편지는 전주류씨와 진성이씨 간의 혼맥을 통한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동의 사족들은 서로간의 혼백으로 맺은 관계를 통해서 어떠한 문제에 공동으로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결혼과 관련된 절차가 편지에서 일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