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8월 28일, 靜村 李文稷이 이른바 李弼濟 亂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71년(고종 8) 8월 28일에 靜村 李文稷이 이른바 李弼濟 亂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와 갑자기 빗속에서 이별하고 끝내 절에서의 만남도 이루지 못했으니 상대를 붙잡지 못하였던 것이 매우 한스러웠다고 하였다. 이어, 맑은 가을날에 상대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기거가 좋은 지 안부를 물었다. 또한 亞庭(숙부) 및 同堂의 안부도 물었다. 한 번의 만남이 너무나 쉽지 않다고 하면서, 비록 혹 만남을 가졌더라도 늘 이별 뒤의 슬픈 마음이 산처럼 쌓인다고 하였다. 李文稷은 일전에 상대와의 약속으로 인하여 붕우들과 함께 팔십 나이의 堂父를 모시고 흥을 타고 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文老를 만나서 지나가는 길에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가 지레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서 아쉬운 마음이 한량없었다고 하였다.
李文稷은 雲峴에서 愚川(洛坡 柳厚祚를 위시한 豊山柳氏의 집성촌. 여기서는 곧 柳厚祚일 것으로 보임)으로 보낸 편지를 보고서 鄭海淸이 全 嶺南을 모함하여 ‘鳥嶺이 안에서 호응한다.’고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膽이 떨렸다고 하였다. 李文稷은 이것에 대해 해명하지 못한다면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 분할 뿐만 아니라 차후 洋夷가 가득 침범할 때에 만약 嶺南에서 의병 거사가 없게 되면 분명히 鄭海淸의 고변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오해를 살 것이라며 걱정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또한 慶科가 열린 뒤에 이에 참여하지 않는 집안이 있으면 ‘鳥嶺의 餘黨’이라고 지목될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건이란 이 무렵 聞慶 鳥嶺을 중심으로 한 李弼濟 亂이었다. 이 사건은 鄭海淸이라는 자의 告變으로 시작되었는데, 李弼濟 등과 고변인의 供辭에서 안으로는 嶺南이 전적으로 동조하고 밖으로는 洋賊이 來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嶺南儒生들이 서원 훼철과 관련한 상소를 위해 都會를 여는 것은 실은 역모에 가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편지를 보내어 이것이 황당한 말이고 선동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지만, 이 말이 鞫廳에서 나온다면 장차 嶺南人들이 화를 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실로 嶺南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원군이 서원 훼철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嶺南人들을 겁박하기 위해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李文稷 편지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雲峴에서 愚川으로 보낸 편지’란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대원군의 편지로서 『羅巖隨錄』에 「雲宮抵柳閤書」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끝으로, 이 문제에 관한 모임 계획을 전하고 이에 대한 瓢溪 여러분들 및 상대의 의견을 물었다. 대원군의 편지가 겉으로 嶺南의 입장에 서 있다고는 해도 이것만 믿고 좌시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袍衣를 올리니 수령해 달라고도 하였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시기적으로 石隱 柳基鎬(1823~1886)인 것으로 보인다.
『지역과 역사』제4호, 정진영, 1997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