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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871.4717-20130630.010325700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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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문직, 류기호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71
형태사항 크기: 28 X 37.3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박실 전주류씨 수정재고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1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1871년 8월 28일에 이문직이 ‘이필제의 난’과 관련하여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우선 상대와 상대 숙부 및 집안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본론으로, 자신이 대원군의 편지를 보게 되었는데, 정해청이필제의 난과 관련하여 우리 영남선비들을 모함한 사실에 대해 알렸다. 그래서 우리가 이에 대해 해명하지 못한다면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시대상황에 우리가 의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오명을 쓸 것이고, 또 慶科에도 참여하지 않는 집안이 있으면 난에 가담한 잔당이라고 지목될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원 철폐와 관련한 상소를 위해 모임을 여는 것도 역모의 오명을 쓸 수 있음을 알렸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 계획을 전하고 상대의 의견을 물었다.
김동현

상세정보

1871년 8월 28일, 靜村 李文稷이 이른바 李弼濟 亂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71년(고종 8) 8월 28일에 靜村 李文稷이 이른바 李弼濟 亂과 관련하여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와 갑자기 빗속에서 이별하고 끝내 절에서의 만남도 이루지 못했으니 상대를 붙잡지 못하였던 것이 매우 한스러웠다고 하였다. 이어, 맑은 가을날에 상대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기거가 좋은 지 안부를 물었다. 또한 亞庭(숙부) 및 同堂의 안부도 물었다. 한 번의 만남이 너무나 쉽지 않다고 하면서, 비록 혹 만남을 가졌더라도 늘 이별 뒤의 슬픈 마음이 산처럼 쌓인다고 하였다. 李文稷은 일전에 상대와의 약속으로 인하여 붕우들과 함께 팔십 나이의 堂父를 모시고 흥을 타고 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文老를 만나서 지나가는 길에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가 지레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서 아쉬운 마음이 한량없었다고 하였다.
李文稷雲峴에서 愚川(洛坡 柳厚祚를 위시한 豊山柳氏의 집성촌. 여기서는 곧 柳厚祚일 것으로 보임)으로 보낸 편지를 보고서 鄭海淸이 全 嶺南을 모함하여 ‘鳥嶺이 안에서 호응한다.’고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膽이 떨렸다고 하였다. 李文稷은 이것에 대해 해명하지 못한다면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 분할 뿐만 아니라 차후 洋夷가 가득 침범할 때에 만약 嶺南에서 의병 거사가 없게 되면 분명히 鄭海淸의 고변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오해를 살 것이라며 걱정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또한 慶科가 열린 뒤에 이에 참여하지 않는 집안이 있으면 ‘鳥嶺의 餘黨’이라고 지목될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건이란 이 무렵 聞慶 鳥嶺을 중심으로 한 李弼濟 亂이었다. 이 사건은 鄭海淸이라는 자의 告變으로 시작되었는데, 李弼濟 등과 고변인의 供辭에서 안으로는 嶺南이 전적으로 동조하고 밖으로는 洋賊이 來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嶺南儒生들이 서원 훼철과 관련한 상소를 위해 都會를 여는 것은 실은 역모에 가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편지를 보내어 이것이 황당한 말이고 선동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지만, 이 말이 鞫廳에서 나온다면 장차 嶺南人들이 화를 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실로 嶺南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원군이 서원 훼철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嶺南人들을 겁박하기 위해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李文稷 편지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雲峴에서 愚川으로 보낸 편지’란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대원군의 편지로서 『羅巖隨錄』에 「雲宮抵柳閤書」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끝으로, 이 문제에 관한 모임 계획을 전하고 이에 대한 瓢溪 여러분들 및 상대의 의견을 물었다. 대원군의 편지가 겉으로 嶺南의 입장에 서 있다고는 해도 이것만 믿고 좌시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袍衣를 올리니 수령해 달라고도 하였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시기적으로 石隱 柳基鎬(1823~1886)인 것으로 보인다.
『지역과 역사』제4호, 정진영, 1997
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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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71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瓢溪 服座 執事。
省式。以有蕭寺再約。遽作雨中送別。竟失於
寺。深恨其未挽也。謹候淸秋。
返定後啓處淸裕。無向時勞攘之害。
亞庭氣候曁同堂僉履。幷安衛否。一
番追隨。甚是不易。而縱或得奉。每爲凌遽別後
之悵。依舊山積耳。弟。日前因兄一約。携
得意中朋友。陪侍八十堂父。乘興入山。偶逢
。歷路仍與一宿。而尊旆竟聞逕還。悵失
可量耶。且見雲峴愚川書。知有鄭賊海
之驅誣全。謂之鳥嶺內授云。則令人膽掉。
不覺其氣踴如山。此而不卞。則不但目下蒙穢之爲可
憤。雖以日後慮言之。洋搔充斥之日。若無倡旅之
發。則必疑之以前聞之不誣。慶科設場之後。爲有自停之家。則又當
目之以鳥嶺餘黨。卽此二事。深所預料。且聞疏儒中誰某誰某。已入
都錄中云。則萬有見捉之道。何能自明乎。以此以彼斷不可晏然
冷笑。玆興寺會諸人議定。一會於府中。而又令奉告於相定之間。
未知貴中僉見及兄意以爲如何。如或不從爲不可。則望須一齊唱發。
俾卽成會如何。京書。若或見深於全之心。而不可恃此而坐待耳。袍
衣爲呈上。考領如何。輞川所發之說。亦勿忘却時以提示。俾有得諾。
則何幸何幸。餘萬。臨便劇忙。不宣狀。
辛未 八月 卄八日。服弟 文稷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