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4월 17일, 李文稷이 종형제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71년(고종 8) 4월 17일에 靜村 李文稷(1809~1877)이 종형제를 잃은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위문편지이다.
먼저, 우리 儒林에 액운이 닥쳐 의지했던 인물을 잃은 것에 대해 경악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柳基鎬가 작년에 仲叔인 孔巖 柳致好를 보냈고 올해에는 櫟庵 柳致游를 곡한 데 이어 계속하여 從氏의 喪을 당하였으니, 柳基鎬에게 이는 선봉이 무너지고 오른팔마저 꺾인 형국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柳基鎬의 경우에는 먼 곳의 旅館에서 이런 일을 당하였으니 더욱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집으로 들어가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지 알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얘기들은 柳基鎬가 臨川書院의 請額 운동을 벌이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어 있던 전후 상황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어 喪中에 있는 柳基鎬가 여독으로 지친 상황에서 슬픔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지는 않았는지, 숙부인 省軒 柳致厚가 평안하신지 안부를 물었다. 동쪽과 남쪽으로 헤어진 뒤에 關東의 諸友를 그리워했던 마음이 항상 간절했다고 하였다. 이는 臨川書院 請額 운동으로 유배된 사람들의 유배지가 全羅道와 江原道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참고로 李文稷은 興德에 유배되었었다. 從氏의 죽음에 대한 허망한 심정을 다시 한 번 전하였는데, 눈앞의 事變이 이렇게 망극한 지경에 이르니 상대와 만나더라도 즐거운 마음이 다시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李文稷은 자신이 유배지에 도착하였을 때에 매우 평온하였고 유배 온 사람들끼리 거리가 가까워서 함께 즐겁게 어울렸다고 하면서, 유배지에서의 극히 위태로운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형편은 자신이 온 湖南만 그러했을 뿐만이 아니고 關東도 그와 같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이는 하늘이 우리들로 하여금 길에서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라고도 하였다. 石門을 처리하는 일에 대해, 작년 겨울 府에 갇혀 있을 때 柳基鎬의 숙부의 정중한 논의를 얻었고 다시 春坡翁 金龍洛과 함께 밤이 새도록 의논하였으며 봄에는 또 날짜를 정하여 편지로 유배지에 알렸기 때문에, 동행하였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명 서찰로 알려서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해 대략 말했다고 하였다. 본 편지 원문의 "石門措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 단락을 이해할 수 있는데, 아마도 石門精舍에 대한 내용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자신은 근간에 움직일 형편이 못되고 柳基鎬도 여가가 없으니 그저 잠자코 있다가 훗날 만나서 논의할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慵庵 金獻洛도 이미 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직 안부를 묻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그가 묏자리를 구하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을 물었다. 金獻洛도 李文稷 등과 함께 같은 일로 金城에 유배되었다가 이 무렵 돌아왔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