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71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871.4579-20130630.010325700374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문직, 류기호
작성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작성시기 1871
형태사항 크기: 24.4 X 38.7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박실 전주류씨 수정재고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1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1871년 4월 17일에 이문직이 종형제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류기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대방이 작년부터 올해까지 계속 상을 당하였는데, 종형제까지 잃은 것에 대해 경악스런 마음을 전하면서, 먼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여 더욱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먼 곳에서 돌아온 상대방의 건강과 숙부인 류치후의 안부를 묻고, 벗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자신은 유배지에 도착했을 때 매우 평온하였고 유배 온 사람들끼리 즐겁게 어울린다고 하였다. 석문에 관한 일을 언급하면서, 작년 겨울 부에 갇혀 있을 때 류기호김용락과 밤새 의논하였으며 연명편지로 알려서 그렇지 않은 이유를 대략 말했다고 하였다. 자신과 상대방은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니 훗날 만나서 논의할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김헌락도 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묏자리를 구하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서진영

상세정보

1871년 4월 17일, 李文稷이 종형제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71년(고종 8) 4월 17일에 靜村 李文稷(1809~1877)이 종형제를 잃은 石隱 柳基鎬(1823~1886)에게 보낸 위문편지이다.
먼저, 우리 儒林에 액운이 닥쳐 의지했던 인물을 잃은 것에 대해 경악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柳基鎬가 작년에 仲叔인 孔巖 柳致好를 보냈고 올해에는 櫟庵 柳致游를 곡한 데 이어 계속하여 從氏의 喪을 당하였으니, 柳基鎬에게 이는 선봉이 무너지고 오른팔마저 꺾인 형국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柳基鎬의 경우에는 먼 곳의 旅館에서 이런 일을 당하였으니 더욱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집으로 들어가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지 알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얘기들은 柳基鎬가 臨川書院의 請額 운동을 벌이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어 있던 전후 상황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어 喪中에 있는 柳基鎬가 여독으로 지친 상황에서 슬픔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지는 않았는지, 숙부인 省軒 柳致厚가 평안하신지 안부를 물었다. 동쪽과 남쪽으로 헤어진 뒤에 關東의 諸友를 그리워했던 마음이 항상 간절했다고 하였다. 이는 臨川書院 請額 운동으로 유배된 사람들의 유배지가 全羅道江原道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참고로 李文稷興德에 유배되었었다. 從氏의 죽음에 대한 허망한 심정을 다시 한 번 전하였는데, 눈앞의 事變이 이렇게 망극한 지경에 이르니 상대와 만나더라도 즐거운 마음이 다시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李文稷은 자신이 유배지에 도착하였을 때에 매우 평온하였고 유배 온 사람들끼리 거리가 가까워서 함께 즐겁게 어울렸다고 하면서, 유배지에서의 극히 위태로운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형편은 자신이 온 湖南만 그러했을 뿐만이 아니고 關東도 그와 같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이는 하늘이 우리들로 하여금 길에서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라고도 하였다. 石門을 처리하는 일에 대해, 작년 겨울 府에 갇혀 있을 때 柳基鎬의 숙부의 정중한 논의를 얻었고 다시 春坡翁 金龍洛과 함께 밤이 새도록 의논하였으며 봄에는 또 날짜를 정하여 편지로 유배지에 알렸기 때문에, 동행하였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명 서찰로 알려서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해 대략 말했다고 하였다. 본 편지 원문의 "石門措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 단락을 이해할 수 있는데, 아마도 石門精舍에 대한 내용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자신은 근간에 움직일 형편이 못되고 柳基鎬도 여가가 없으니 그저 잠자코 있다가 훗날 만나서 논의할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慵庵 金獻洛도 이미 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직 안부를 묻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그가 묏자리를 구하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을 물었다. 金獻洛李文稷 등과 함께 같은 일로 金城에 유배되었다가 이 무렵 돌아왔다.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1년 이문직(李文稷) 서간(書簡)

文稷痛哭言。豈意吾林之厄運。失了長城。前
年送
仲阮令公。今年哭
季阮上舍。繼而從氏之慘。皆是拔前茅。而
折右臂矣。天意之不欲使斯文復振。此其兆耶。使
逝者觀之。猶勝於吾輩之坐視將亡而莫之救者
然後死之痛。知舊猶然。況
兄千里旅館。遭此情理。尤何忍堪耐也。聞
返定有日。仰認入門摧割。當復如何。謹問比來。
服履起居。得無撼頓餘疚傷之害。
亞庭節宣能保安衛否。一自東南分張之後。所
以傾嚮於關以東諸友者。何嘗一日可弛。而中間因泮村
付候。亦未卜其必達以否。漠然相閡。謂當早晩解
還之日。庶可以團聚攄盡矣。數朔之間。人事之不可
知者。乃如此。遂使城南餞別之語。遽作九原難作之慟。
況今目下事變。至此罔極。雖與兄相對。更無樂意可
討。謂之奈何。弟。在時病情。殆令同伴者。備盡焦思。而到彼
後。安頓極好。相距又甚邇。追隨遊衍之樂。了無遷謫極
危之端。乃知今行得此。儘非偶然。不但湖南
爲然。關東亦如之云。則天之不欲使吾輩。困
於道路。豈無所以哉。但歸聞鄕議之非議譏
笑。猶恐擠陷之不盡。還
可笑歎耳。石門措處。昨
冬滯府時。得阮府鄭
重之論。仍與春坡翁達夜
論說。而春間又定期。書通
於匪所。故與同行諸兄。聯札
以報。略道其不然之由矣。
見今額院至此。事體又
變。未知果如何也。所欲奉
際者甚急。而弟無從近
蠢動之勢。兄亦無暇
抽出。只合默。而俟面商而
已。餘。客擾不宣狀。伏惟
服下照。狀上。
辛未四月十七日。弟 李文稷。拜。

仲賢亦已到家云。姑未相問
耳。向聞有乞山之行。發落何如。欲從近經
紀否。甚欲與知耳。便甚忙。諸書幷闕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