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2월 9일, 大溪 黃在英이 자신의 隨錄에 대한 상대의 평가에 관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70년(고종 7) 2월 9일에 大溪 黃在英(1835~1885)이 자신의 隨錄에 대한 상대의 평가에 관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가 몇 백리 먼 길을 직접 와서 조문해 주었던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서 상대를 더 머물게 하지 못하여 비를 맞게 하였으니 오랫동안 죄송스런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설을 쇠기 전에 金溪의 인편을 통하여 9월 12일에 작성하신 편지를 받고서 매우 고마웠으나 인편이 전혀 없었고 黃在英 집안에 사고가 많이 터져서 답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신년에 들어서 상대 및 亞庭(숙부)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 한들의 景中 兄을 만나서 대략의 상황을 물어보기는 하였으나 아직 근래의 상세한 안부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黃在英 자신은 어느덧 삼년상을 마치게 되니 애통한 마음이 한량없다고 하면서, 다행히 어버이와 권솔들은 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黃在英은 지난가을 며칠 동안 상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십년 동안의 독서에 대적할 만한 것이라고 여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상대의 편지 내용이 欣歎이나 漫浪的인 부분이 많고 敬謹이나 規勉的인 부분은 적었으니, 더욱 자신으로 하여금 경계의 마음이 들게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으로는 師友로부터 받는 유익함이 반드시 肅容을 莊攝하는 때에 있는 것은 아니고 여유롭게 담소하면서 주선하는 데에도 기쁘고 각성되는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觀感興起하는 바에 있어서 도리어 깊고 간절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의 隨錄이 당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가르침을 청하는 데에 급하여 감히 숨기지 못하였는데, 상대가 도리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題目을 붙여 준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이 小白山의 궁벽한 골짜기에 있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人心이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자석이 바늘을 당기고 호박에 검불이 붙듯이 하니 지극히 어리석은 자신의 자질이라도 專一하기만 하면 천리 밖의 사람과 서로 감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며, 답장이 늦어진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하였다.
大溪 黃在英은 榮州 昌原 黃氏 문중의 걸출한 학자이다. 그는 白野 黃中愼의 손자이자 左副承旨 黃仁夏의 아들로,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다. 1851년(철종 2)에 承旨 金鎭右 집안에 장가를 들었는데, 金鎭右는 壽靜齋 柳鼎文의 사위이다. 金鎭右는 全州 柳氏와 혼인하여 慵庵 金獻洛과 雲圃 金景洛, 義城 金氏(大溪 黃在英의 처)를 낳았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시기적으로 石隱 柳基鎬인 것으로 보인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