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윤4월 4일, 이만각이 여강서원의 직임을 수행하는 문제 등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868년(고종 5) 윤4월 4일에 愼庵 李晩慤(1815~1874)이 여강서원의 직임을 수행하는 문제 등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번에 상대의 답장을 받으니 또 한 번 목이 메었다고 하였다. 이어, 편지를 읽고서 상대 형제 및 喪中에 있는 아드님, 發孫이 모두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근황을 물었다. 자기는 弟嫂의 祥事를 치른 데 따른 동기간의 허무한 심사 및 다시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감을 전하였다. 아울러 宿病이 회복되지 않아서 비록 억지로 거동하려고 해도 쓰러질 지경이라고 하고, 독서에 제대로 전념하지 못하여 古人의 心事에 비추어 매우 부끄럽다고도 하였다.
또한 廬江書院에 자신이 辭職單子를 올렸던 것은 다만 병이 깊었기 때문이었으니 의리를 내세운 바가 없었는데도 原任의 題音이 이렇게 정중하므로 한결같이 모른 체해서는 안 될 형편이라고 하였다. 다만 祭享의 날짜가 아직 멀었으니, 그때 가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일단 院任은 수락하고 書院 享祀 때 가서 최종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끝으로, 갑자기 귀가를 재촉하는 상대의 손자를 만류하지도 못했고 말과 노복을 준비할 수도 없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전하였다. 추신에서는, 매우 노곤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내야 할 편지를 쓰지 못했다고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발급인 李晩慤은 자가 謹休, 호는 愼庵이고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柳致明․ 李秉遠의 문인으로 1865년 朴珪壽의 추천으로 繕工監 假監役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李滉과 奇大升 간에 있었던 ‘四七理氣論’을 발전시켰고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저서로는 『巖后類記』․ 『愼庵集』 등이 전해진다. 이 편지의 수급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李晩慤은 딸 셋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녀가 石下 柳建鎬의 아들인 柳淵愚에게 시집을 갔다. 따라서 수신자는 柳建鎬일 것으로 보이나 확신할 수 없다. 또한 壽靜齋 古宅과 관련지어 보면, 수신자가 石隱 柳基鎬(1823~1886)일 가능성도 크다.
이 편지는 향촌사회에서 서원을 운영하는 원임들으 일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촌의 원임은 老成하며 학문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선출되었다. 또한 편지에서 보듯이 자신의 몸이 아파서 원임직을 사임 단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서원의 제사로 그 단자가 거부되는 모습을 통해 향촌사회 내에서의 서원의 중요성과 公論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