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12월 13일, 大溪 黃在英이 근황을 전하고 국가의 自彊策 등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
1866년(고종 3) 12월 13일에 大溪 黃在英(1835~1885)이 근황을 전하고 국가의 自彊策 등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 石隱 柳基鎬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가 병든 자신을 찾아준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는데 길이 멀고 인편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옛날 從遊하던 즐거움을 추억해 보면 마치 아득히 다른 세상의 일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 상대 및 그의 여러 亞庭(숙부) 및 각 댁의 안부를 물었다. 黃在英 자신은 重親께서 홍역이 퍼지는 상황으로 인하여 피접하러 나가신 지 이미 9달이 되었고 부친(黃仁夏)께서 근래 또 서울에 가셨으니, 그에 대한 자신의 근심이 여러 가지라고 하였다. 또한 中兒 등이 홍역을 앓은 뒤에 건강하지 못한 애들이 많기에 날마다 근심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洋夷가 육지를 침범하였으니 매우 걱정하였는데 지금은 다행히 잠잠해졌으나 앞으로 환란이 없을지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內政을 닦아 외적을 물리칠 방도에 대해 상대가 과연 평소에 생각해 놓은 바가 있는지 물었다. 자신과 같은 布衣의 평범한 주장이 비록 무익하다고는 하나 국가에 대해 깊이 근심하는 것이 또한 어찌 직분과 관련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상대가 세상일을 겪고 功名과 利祿을 끊은 지 이미 많은 해가 되었으니 스스로 성찰한 생각이 근래 어떠한지 묻고, 아울러 堂內 및 교유하는 인물 가운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자신에게 가르쳐 주어서 자신의 고루함을 일깨워 달라고 청하였다. 끝으로, 黃在英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나 소란스러움이 더욱 늘었기 때문에 『朱書』를 읽은 지 몇 년이나 되었어도 斷案은 기약이 없다고 하였다. 글을 써서 金溪의 인편으로 부쳤으니 조만간 보신 뒤에 답장을 써서 그곳으로 보내어 자신이 전달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大溪 黃在英은 榮州 昌原 黃氏 문중의 걸출한 학자이다. 그는 白野 黃中愼의 손자이자 左副承旨 黃仁夏의 아들로,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다. 1851년(철종 2)에 承旨 金鎭右 집안에 장가를 들었는데, 金鎭右는 壽靜齋 柳鼎文의 사위이다. 金鎭右는 全州 柳氏와 혼인하여 慵庵 金獻洛과 雲圃 金景洛, 義城 金氏(大溪 黃在英의 처)를 낳았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시기적으로 石隱 柳基鎬인 것으로 보인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