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7월 14일, 이만각이 근황을 전하고 방문을 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65년(고종 2) 7월 14일에 愼庵 李晩慤(1815~1874)이 근황을 전하고 방문을 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번에 갔다가 돌아온 뒤로 상대 쪽으로 곧장 가는 인편이 왕래하기도 하였으나 자신이 마침 외지에 있느라 안부편지를 드리지 못하였다고 했다. 또한 올해가 상대의 환갑이 있는 해인데도 祝賀詩를 드리지도 못하였다고 하면서, 마치 먹은 음식이 소화되지 않은 것처럼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웠다고 하였다. 이어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기운이 찾아온 이때에 상대 형제의 기거가 한결같이 복된지, 아드님이 江右로 갔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가 계획된 날짜에 돌아왔는지, 또 지난번에 앓았던 병이 쾌차하였는지 안부를 물었다.
李晩慤은 누이가 말을 보내 자신을 초대한 것으로 인하여 열흘이 넘게 걸리는 유람을 했다고 하였다. 시를 짓고 차를 끓여 마시며 술을 마시고 문장을 평론하는 등 유람하는 과정에서 비록 동작을 많이 하지 말라는 옛사람의 경계는 어겼지만 늘그막에 갑갑한 마음을 풀어 시원하게 하는 데에는 괜찮았다고 하였다. 돌아와서는 또 法祖인 李文稷의 방문을 받아서 5, 7일 함께 지내면서 수삼 년 동안 쌓였던 시름을 씻어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상대까지 초대함으로써 붕우 간에 나누는 즐거움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였던 것이 안타까웠다고 하였다. 發孫의 근황이 어떠한지 묻고, 날씨가 서늘해지면 데리고 오겠다고 상대가 일찍이 약속한 바도 있고 해서 사람과 가마를 보내어 재촉하고자 했으나 근래 奴丁이 부족하여 그대 혼자만 오게 했다고 하면서, 부디 이번 달 17일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溪南의 병환은 다행히 餘症은 없으나 族叔께서 늘 편찮으시다고 하면서, 서로 만나면 상대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데 대해 늘 안타까워하니 손자를 데리고 함께 왕림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끝으로, 상대의 농사에 대한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였다.
발급인 李晩慤은 자가 謹休, 호는 愼庵이고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柳致明․ 李秉遠의 문인으로 1865년 朴珪壽의 추천으로 繕工監 假監役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李滉과 奇大升 간에 있었던 ‘四七理氣論’을 발전시켰고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저서로는 『巖后類記』․ 『愼庵集』 등이 전해진다. 이 편지의 수급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李晩慤은 딸 셋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녀가 石下 柳建鎬의 아들인 柳淵愚에게 시집을 갔다. 따라서 수신자는 柳建鎬일 것으로 보이나 확신할 수 없다. 또한 壽靜齋 古宅과 관련지어 보면, 수신자가 石隱 柳基鎬(1823~1886)일 가능성도 크다.
이 편지는 전주류씨와 진성이씨 간의 혼맥을 통한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동의 사족들은 서로간의 혼맥을 통해 가문의 격을 유지하였으며 이를 통해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동안 맺은 관계를 통해서 어떠한 문제에 공동으로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