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4월 10일, 李在韶가 역병으로 자식을 잃은 姊氏의 안부를 묻기 위해 자형에게 보낸 편지
1862년 4월 10일에 李在韶가 역병으로 자식을 잃은 姊氏의 안부를 묻고 역병에 대해 처신할 방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자형에게 보낸 편지이다.
姊氏가 쇠약한 몸으로 중병과 나쁜 상황을 겪고도 온전한지 물었다. 圭玉같은 사람이 죽어 萬事가 꿈같다고 하였다. 아직 병을 옮기지 않은 사람들이 역병을 피했는지 묻고, 타향에서 사망한 시신을 고향으로 돌리는 것은 정신을 수습하고 세상이 깨끗해지기를 기다려 하기를 바라였다. 姊氏가 병을 겪은 후 갑자기 변고를 당해 조섭과 위로를 할 사람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할지 물었다.
雇奴가 또 역병에 걸려 외따로 격리시킨 지 이미 10여일이 지나 땔감과 농사를 모두 貰人을 쓰므로 비록 銅山을 소유하였더라도 돈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김매는 것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거의 어려워 수족이 묶여 꼼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家兒의 병이 심해졌다가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하며 완전히 풀리지 않아 괴롭다고 하고 며느리가 우연히 불에 다쳐 眉間을 펼 일이 없다고 하였다. 平泉家는 일찍이 이미 병을 겪었는데 14세 아이가 더욱 아파 한 가닥 희망이 점점 구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든다고 하면서 한탄하였다. 通里의 襄禮는 禮를 따라 달을 넘겨 치를 계획인데 자리를 찾지 못해 괴롭다고 하였다. 다만 老親 두 분의 건강이 寓所에 계신데도 별다른 병이 없어 다행이라고 하였다.
편지를 쓴 이후에 從氏가 집으로 보낸 兒書를 보니 初終 뒤에 아직 역병을 피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탓하였다. 反柩는 5월에 한다고 하니 일자 전에 반드시 기별하여 가서 곡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추신으로 下隸의 말을 들어보니 누각 아래를 닦았을 뿐 본래 돌림병에 걸린 바가 없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다.
발급자 李在韶(1812~1883)는 본이 驪江이고 자는 聲遠이며 호는 雪右이다. 父는 李凝祥이며 慶州 良洞에 거주하였다. 1844년 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