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 6월 17일, 류기호가 근황을 전하고 약을 보내주기 위해 김기영에게 보낸 편지
1846년(헌종 12) 6월 17일에 石隱 柳基鎬(1823~1886)가 근황을 전하고 약을 보내기 위해 金耆永에게 보낸 편지이다.
뜻밖에 받은 김기영의 편지로, 장마철 무더위에 重堂께서 환후가 늘 많으심을 살피게 되니 매우 걱정이 되지만, 김기영이 평안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였다. 특히 남겨진 아이도 목숨을 부지하였다고 하는데,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겨서 살길을 찾았냐고 물었다. 류기호 자신은 重親께서 寓居하며 지내시는 체후가 그럭저럭하시고 어린 아들들도 무탈하니 비할 바 없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형제가 온종일 놀기만 하고 공부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큰놈은 본래 포기했지만 막내는 장차 어찌할지 걱정이 크다고 하였다. 자신은 무릎에 난 종기 때문에 날마다 신음하다가 어제 겨우 고름이 터졌는데 여독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에 고민스럽다고 하였다.
이어, 지난번에 자신이 보냈던 丸藥이 상하지 않고 잘 도착했는지를 묻고, 설사병을 앓고 있다면 날마다 한두 개를 복용해도 해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많이 보내지는 못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하고, 쓰다가 남은 것이 다만 5개뿐인데 이를 올린다고 하면서, 이전 것과 함께 써보라고 권하였다. 끝으로, 김기영이 보내준 南草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류기호는 壽靜齋 柳鼎文의 손자이자, 伯窩 柳致孝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한 분의 누님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義城人 김기영에게 시집을 갔다. 따라서 류기호와 김기영은 처남매부지간이다. 김기영은 金彦銖의 아들로 자가 昶老이다. 참고로 曺兢燮이 지은 「石隱柳公墓碣銘」에 따르면, 류기호는 14세 때에 부친을, 17세 때에 조부를, 20세 때에 부인을, 22세 때에 모친을, 27세 때에 동생을, 30세 때에 하나 남은 아들을, 33세 때에 조모를, 34세 때에 후실을 잃는 등 청년기에 참혹한 喪禍를 입었다. 이 편지를 써서 보내던 당시에도 그는 母親喪中에 있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