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년 6월 22일, 이언순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38년(헌종 4) 6월 22일에 聾窩 李彦淳(1774∼1845)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해가 바뀌도록 만나지 못하여 그리운 마음이 간절했다고 하였다. 이어 늦더위에 상대가 연이어 평안한지 아드님들도 모두 평안하며 가족들이 고루 평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李彦淳 자신은 衰病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봄과 여름에 치렀던 것이 끔찍했다고 하였다. 지금에야 병이 덜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 회복은 기약이 없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쇠약한 데 따른 증상이니 그저 크게 한탄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상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러한 근심을 면하고 있는지 물으면서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공통된 이치임에랴 어찌하겠느냐고 하였다.
작황은 영남이 비록 畿湖보다는 낫다고들 하나 영남도 끝내 흉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앞으로 닥친 일이 미리부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늘 상대를 만나서 인사를 드리려고 마음먹었으나 병으로 말미암아 지금에야 비로소 편지로 대신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것이 어찌 평소 서로 의지하고 있던 사람 사이의 情誼이겠느냐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唐門紙, 唐簡, 沙糖, 揉餌등을 선물로 올린다고 하였다.
발급인 李彦淳는 자는 景寬, 호는 聾窩이고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1804년 式年試 문과에 급제하고 忠淸道 觀察使 ․ 工曹 參議 ․ 同副承旨 ․ 春川 府使 ․ 大司諫 ․ 永興 府使 ․ 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1822년 暗行御史로 지방 수령들의 부정을 철저하게 다스려 강직한 인사로 이름이 높았다. 1840년 吏曹 參判을 지냈다. 安重晦의 딸인 順興安氏와 혼인하여 潢皐 李彙廷을 낳았는데, 李彙廷은 곧 石下 柳建鎬의 장인이 된다. 수신자는 시기적으로 壽靜齋 柳鼎文인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영남 지역 사족들의 관계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편지의 발급인인 李彦淳은 순흥안씨와 혼인을 하였으며 그의 아들 李彙廷은 전주류씨와 혼맥으로 맺어진다. 즉 안동의 사족들은 서로간의 복잡한 혼맥을 통해 향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