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 9월 20일, 이태순이 류정문에게 아들의 상사에 위문편지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36년(헌종 2) 9월 20일에 草庵 李泰淳(1759~1840)이 柳鼎文(1782~1839)에게 아들의 상사에 위문편지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자신이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해 상대가 편지로 위문한 것은 감사드리나 아들이 죽은 일은 자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고 상대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붓을 잡고 억지로 편지를 써서 자신의 슬픈 마음을 격동시킨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고 하였다. 지난번에 伯窩 柳致孝가 죽었을 때에 자신이 한 마디 말도 奉問하지 않았던 것을 잊지 않고 있으니, 이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李泰淳의 이러한 말은 상대가 위문편지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역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상대가 위문편지로 특별하게 아들의 죽음에 애통한 심정을 표하고 살아남은 자신을 위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관에 누워 있는 몸인 아들을 不朽하게 해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이어서 상대가 보내준 편지로 상대가 喪中에 잘 버티어 내고 있고 아드님 형제가 고루 건승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위안이 되는 마음이 애통하고 경황이 없는 와중이라고 하여 줄어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늙어 쇠약한 몸으로 이승에 겨우 살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數三의 좋은 친구가 있고 안으로는 병든 아이가 있어 늘그막을 버티어 갈 수 있었는데, 자신과 상대가 갑자기 아들을 잃게 되니 말문이 막힌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런 화가 어질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한 자신이 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책감을 표하였다. 아들의 장례가 26일로 정해졌다고 하였고, 묘를 쓰는 일에 문제가 생겨서 막내아이가 늘 산 아래에 있으면서 온갖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험악하고 위험한 상황이 갈수록 끝이 없다고 하였다. 추신에서 외손녀와 그 아이가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하고 고아가 된 당신의 손자들도 잘 버티고 있으며 공부에 성과가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
발급인 李泰淳는 자는 來卿, 호는 草庵이고 본관은 眞城, 본적은 安東이다. 아버지는 李龜元이다. 1783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였고 1801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 典籍 ․ 司諫院 正言 ․ 楚山 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수신인 柳鼎文은 자는 耳仲, 호는 壽靜齋이고 본관은 全州, 본적은 安東이다. 조부는 柳道源이며, 부친은 柳範休이다. 1805년(순조 5) 과거에 낙방하자 관직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禮學과 經學에 두루 밝았다. 슬하에 柳致孝 ․ 柳致敎 ․ 柳致厚 ․ 柳致好 ․ 柳致游를 두었다. 李泰淳의 손녀인 眞城李氏가 石隱 柳基鎬와 혼인하였으므로, 柳基鎬는 그에게 孫壻가 된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영남 지역 사족들의 관계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편지의 발급인인 李泰淳는 전주류씨와 혼인을 한 인물로 자신의 아들이 죽자 柳鼎文이 편지를 보내 상대를 위로해 주었다. 즉 어렵거나 힘든 일이 발생할 때 사족들이 공동으로 도움을 준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