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 2월 10일, 柳箕鎭이 백씨의 사망에 애도의 정을 표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36년(헌종 2) 2월 10일에 可隱 柳箕鎭(1792~1856)이 백씨의 사망에 애도의 정을 표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吾黨이 伯氏를 잃었으니 장차 어떻게 연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伯氏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전하였다. 그 아우들이 모두 훌륭하더라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으며, 더구나 늘그막의 어버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돌아가신 스승님의 고택에 절대 이러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창졸간에 병을 앓다가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비록 목 놓아 하늘에 호소하여 하늘이 찢어지게 되더라도 그 애석하고 비통한 심정은 다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망자의 여러 아우들이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으나, 아침저녁으로 어버이를 보살펴 드릴 때에 이치로 잘 위로하여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케 해드리며, 남편 잃은 부인과 애비 잃은 아이들을 잘 건사하고 있느냐고 하였다. 류기진은 자신이 과거에 睦를 잃었을 때와 지금의 상황이 흡사하다고 하면서, 전도유망한 사람들이 차례로 죽은 것에 대해 난감함을 표하였다. 장례식 전에 영결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로도 일에 골몰되어 찾아가지 못하였다고 하면서도, 이는 실제로는 목격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고 慰狀도 이에 따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서로 격조하게 지내는 것은 차마하지 못할 바이기에 조만간 한 번 가서 통곡할 날을 기다리지만 水谷의 일 이후로 자신이 나가는 일이 마침내 드물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柳箕鎭(1792~1856)은 자는 京老, 號는 可隱, 본관은 全州이다. 특히 효성과 우애가 뛰어난 인물로 평가된다. 편지에 언급되고 있는 伯氏는 발급년도를 감안할 때 伯窩 柳致孝일 것으로 보인다. 柳致孝는 이해 1월 3일에 3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