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9월 10일, 김건수가 여러 근황을 전하고 면례 참석에 대한 일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831년(순조 31) 9월 10일에 止庵 金健壽(1804~1866)가 여러 근황을 전하고 면례 참석에 대한 일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소식이 없다가 뜻밖에 당신께서 편지를 보내 자신의 마음이 위로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깊은 가을에 緬禮 중에 있는 상대가 평안한지, 식솔들은 고루 평안한지를 물었고, 특히 좋은 묏자리를 잡아서 이장을 앞두고 있는 것에 대해 효성 지극한 상대가 몇 년 동안이나 경영하던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매우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金健壽 자신은 어버이와 집사람의 병환이 점차로 회복되어 가고 있으니 다행스러우나, 자신의 숙환은 근래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몸가짐을 단속하거나 공부에 전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必身 柳致潤 형제가 한결같이 평안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다만 再娶가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였다. 여름에 얘기됐던 일은 자신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이유로 피차간에 낭패를 겪게 하였으니 매우 죄송하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어 면례 날에 참석하려고 하나 몸을 빼내어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하면서 사전에 그 실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끝으로, 再從叔께서 오랫동안 편찮으시던 상황에서 上舍 從兄의 喪으로 인하여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우셨다고 하면서, 이로부터 한 달 남짓 병이 치유되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진실로 깊다고 하였다.
발급인 金健壽는 자가 文瑞, 호는 止庵이고 본관은 義城, 본적은 경상북도 龜尾市 善山邑이다. 鶴峰 金誠一의 후손으로, 부친은 金百燦이고 부인은 柳少文의 딸 全州柳氏이다.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37년(헌종 3) 식년시 진사 3등 67위로 합격하였다. 1847년(헌종 13)에 스승 柳致明과 함께 泗濱書院에서 『鶴峰集』 중 「續集」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각 지방 유림들의 講會에 참석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定齋集』「答金文瑞別紙」과 『定齋集』8권에는 柳致明이 金健壽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기록이 실려 있다. 시기적으로 이 편지의 수신자는 壽靜齋 柳鼎文일 것으로 보이는데, 확신할 수 없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영남 지역 사족들의 관계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편지의 발급인인 金健壽는 전주류씨와 혼인을 한 인물로 당대 유명한 유학자인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이었다. 즉 영남 지역의 사족들은 서로 복잡한 혼맥과 학맥으로 맺고 있었으며 계속적인 교류를 통해 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