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년 12월 11일, 김양관이 공부에 정진해 줄 것을 당부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25년(순조 25) 12월 11일에 金養觀이 공부에 정진해 줄 것을 당부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金養觀은 어버이의 병환으로 날마다 근심하고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하였으며, 鄭氏에게 시집간 누나의 병이 심해지고 李氏에게 시집간 여동생이 큰아들을 잃었다고 하면서, 한 번 가서 보지 않을 수 없어서 지난달 열흘에 출발하였는데 慶州에서 병을 얻어 5, 6일 동안이나 앓아누워 있다가 선대의 忌祭 때문에 병을 안고 돌아왔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누워서 신음하고 있다고 하였다. 상대가 편지 말미에서 언급한 내용은 상대가 喪難을 겪은 뒤에 스스로 힘쓰는 뜻이니 이는 바로 이른바 蒹葭之霜(사람이 재주를 이룸)이라고 하면서, 매우 감복했다고 하였다. 부디 더욱 전일하고 독실하게 공부하여 先先生이 부탁한 지극한 뜻을 어기지 말고 한 가닥 氣脈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라고 간절히 당부하였다. 자신이 꼭 말하지 않더라도 상대는 이미 良遂의 摠知 중에 있을 줄로(이미 훤히 알고 있을 줄로) 생각된다고도 하였다. 또한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것을 유념하는 이가 없는데 상대에게서 비로소 이런 말을 듣게 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감히 충고해 봤다고 하였다.
이어, 자신은 재주도 배움도 없고 버릇도 방탕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킨 것은 말할 수도 없고 병드신 어버이를 모시면서 志體奉養은 기대하기도 어려운데 단순한 봉양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기본적인 것에 이렇듯 엉성한데 다른 것이야 어찌 감히 바라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학문적 성과를 자신에게도 파급시켜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즉 의문 나는 부분을 자신에게 질의하거나 함께 토론하자는 의미이다. 추신에서는, 바래미 金正錬이 지은 그 부인에 대한 祭文을 자신도 보고 싶다고 하면서 이번 인편에 잘 봉해서 부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발신자 金養觀은 자가 以敎, 본관은 安東이다. 川沙 金宗德이 아들 金慶進이 죽자 후사로 정하였다. 金養觀은 壺谷 柳範休의 막내사위이기도 하다. 피봉의 沙村은 현재의 경북 의성 사촌마을을 가리킨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