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8월 10일, 金熙紹가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23년(순조 23) 8월 10일에 文泉 金熙紹(1758~1837)가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번에 柳 持憲(司憲府 持平) 편으로 올렸던 편지를 받아 보셨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고,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막 그치고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 이때에 상대 및 형제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하였으며 몇 칸의 집을 분수에 맞게 마련하였는데 산이 깊고 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좋은 경치가 펼쳐져 매우 흡족하다고 하였다. 여기에 두 아이가 따라 왔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中允이 상대방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있으니,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되어[烏頭力去] 예전처럼 어리석어져서 알려지지 못하고 죽게 될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자신이 쇠약하여 멀고 험한 길을 왕래하는 것이 몹시 걱정이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다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더 나아가, 상대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는 어떠한 운수가 있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근래 왕래하는 제군들 가운데 至親과 제자를 막론하고 의지하고 기대를 걸만한 이가 있느냐고 묻고, 유림의 학문적 활동은 날로 침체되어 가는 상황에서 川蜀黨(宋代에 程頤를 영수로 한 洛黨과 대립하였던 黨)의 논의가 이렇게 가득하니 吾黨의 근심이 실로 크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虎論 입장에서 屛論의 문제를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鄭健夫(牛川 鄭玉의 후손인 듯함)가 간다는 얘기를 마침 듣고서 이렇게 안부편지를 간략히 썼다고 하면서, 그가 돌아올 때에 답장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추신에서는, 李公宅(新野 李仁行)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겨울과 봄에 있었던 먼 여행 후에 여독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또한 출입을 삼가고 책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吾黨의 희망적 존재라고 하였다. 다만 그의 며느리가 배는 부른데 얼굴은 야위었으니 이것이 염려된다고 하였다.
金熙紹는 本貫은 義城이고, 字는 伯雍, 號는 文泉이다. 丹砂 金景溫의 손자이자 金斗東의 아들이다. 故寔軒 金熙洛의 큰형이다. 蘆厓 柳道源이 金景溫의 둘째 사위이므로, 金熙紹 · 金熙洛 형제에게 柳道源은 고모부가 되고, 柳道源의 아들들인 壺谷 柳範休 형제는 고종사촌이 된다. 수신자는 柳範休인 것으로 보인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