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0월 10일, 류범휴가 ‘子夏門人小子章’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10월 10일에 壺谷 柳範休(1744~1823)가 ‘子夏門人小子章’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오랫동안 정담을 나누지 못하였으니 다만 그리운 마음만 쌓였다고 하고 근래 심한 추위에 양친 및 상대의 안부가 어떠한지 물었다. 자신은 한결같이 쇠약하고 피곤한 상태로 신음하고 있고 온종일 많은 손님을 응접하느라 혼란스럽다고 하였다. 그래서 독서할 여가가 나지 않아서 心志가 더욱 황폐해지고 있으니, 다만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고 마는 비애만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근래 상대가 무슨 책을 읽으며 견해는 더욱 정밀해졌냐고 물었다. 오늘날 法門이 쇠퇴하고 吾黨이 쓸쓸해졌는데 다행히 그대들이 있어서 啞谷의 餘韻을 계승하여 氣脈이 이에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우리 집안 안에서 마치 값진 보물을 얻은 것만 같다고 높이 칭찬하였다. 더구나 상대는 한창 나이로 뜻과 견해가 숙성하여 絶倫하니, 나태하지 않고 더욱 노력한다면 무슨 일이든 해내지 못하겠느냐고 권면하였다. 그러면서 부디 平叔[柳廷杰], 子强[柳健休], 誠伯[柳致明] 등과 더불어 강습하여 날마다 진취할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論語』「子張篇」의 ‘子夏門人小子章’의 의심스러운 뜻은 상대가 논한 바가 바른 뜻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晩洲丈 權以復은 일체 饒氏의 학설을 위주로 하고 "다만 그 末을 배우면 本이 곧 여기에 있다.[但學其末 而本便在此]"를 程子의 본뜻으로 간주하기까지 해서 程子의 訓이 朱子의 訓과 모순되도록 하고 集注가 本章과 일치되지 않게 했다고 하였다. 이에 자신의 의견을 別紙에 기록해 두었다고 하면서, 읽어보라고 하였다. 끝으로, 生家의 延婦禮가 가까운 시일 내에 있으니 한 번 행차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그때 혹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발급인 柳範休는 자는 天瑞, 호는 壺谷이다. 조부는 공조 참의 柳升鉉이고 부친은 柳道源이며 모친은 金景溫의 딸이다. 1760년(영조 36) 金江漢의 사위가 되어 학문적 영향을 받았으며 1772년(영조 48) 李象靖의 문하에 들어갔다. 1780년(정조 4) 式年試에 生員 2등 18위로 합격하였고 1785년(정조 9) 천거로 泰陵 慘奉에 임명되었다. 1787년(정조 11) 사옹원 봉사, 약방 제조를 거쳐 다음해 평시서 직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도사, 송화현감, 高城 郡守, 安邊 府使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泮村問答』, 『師門簡牘』, 『壺谷集』이 있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사족들의 家學의 전승과 학문을 권면하는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학문을 업으로 삼은 사대부 계층으로서 가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전승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