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1월 그믐날, 內叔이 예법에 관한 물음에 답해 주기 위해 甥姪에게 보낸 편지
1806년(순조 6) 1월 그믐날에 집안의 內叔이 장례 예법에 관한 물음에 답해 주기 위해 甥姪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10일에 무덤을 쓴 흙이 마르기도 전에 賢婦가 따라 죽으니 매우 참담하다고 하였다. 자신은 훌륭한 德性을 가진 생질이 이러한 화를 입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金光國이, 前喪의 장례 날짜를 10일로 한 것이 좋지 않았다고 하고 移葬하여 橫葬한 것도 큰 착오라고 하였으니, 생질 등은 큰일에 있어서 어찌 충분히 살피지 않아서 남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초래하였는지 힐책하였다. 藏風하고 南向하며 安穩한 곳은 버려두고 높고 드러나며 바람 많은 곳을 선택하고,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順局은 쓰지 않고 橫葬한 일은 사리에 닿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 初終은 어떻게 마쳤는지 묻고, 이런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질의 가족들이 흩어져서 避接하는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였다. 형님(수신자의 부친)은 건강이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庞叟도 평안한지 안부를 묻고, 생질이 편지에서 병이 많고 매우 피곤하다고 한 언급에 대해서도 우려스러운 마음을 전하였다. 자중자애하여 어버이께 근심을 끼쳐 드리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
자신은 初終 뒤에 노비는 없고 일은 많아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지 못하였다고 상황을 설명하였다. 또한 湖上에 갔던 일은 병을 무릅쓰고 소를 타고 가느라 기력이 빠져서 어쩔 수 없이 지레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곳의 형제는 항상 아프지만 두 아이의 병은 모두 완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密陽 조카와 河村 조카도 모두 獨子를 잃었고 高昌에서도 딸을 잃었으니, 자신으로 하여금 기가 빠지게 한다고 하였다. 생질이 질의한 儀節에 대해서는, 後喪에 成服한 뒤에 上殯에 조석으로 上食하는 것은 의례대로 행해야 하고, 朔望奠은 朔望日에 다만 上食床에 간략히 진설하여 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고 하였다. 또한 무덤을 옮겨 새로 쓴 묘소에 대한 墓祀는 사고로 인하여 寒食에 거행하지 못하였으면 뒤미처 할 것까지는 없을 듯하다고 하였다. 끝으로, 思悼世子를 伸寃하기 위한 이른바 嶺南萬人疏의 疏頭였던 李㙖가 全羅道 康津縣 古今島로 島配되게 된 일에 대해서 무력감을 표시하고, 이에 대항하는 세 번째 상소가 이어 올라간 일에 대해서 요즘 세상에도 朝陽鳴鳳(才德이 출중하여 정직하게 敢諫하는 선비)이 있다고 하면서 찬탄하였다.
추신에서는, 그 세 번째 상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는데 韓晩裕・趙得永・李之珩이 右相인 金達淳을 논박하고 이에 대해 純祖의 너그러운 批答을 받았다고 하였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