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5월 7일, 이영운이 관료로 있는 안동 지역 출신 인사의 동향을 전해 주기 위해 보낸 편지
1798년(정조 22) 5월 7일에 俛齋 李永運(1766~1841)이 관료로 있는 안동 지역 출신 인사의 동향을 전해 주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서울로 온 한 달 동안 안부 소식을 받지 못하였기에 그리운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상대 아들의 편지를 받고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상대 및 그 가족들이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천만다행이라고 하였다. 다만 상대가 仲氏, 季氏와 차례로 헤어졌던 때에는 상대의 회포가 괴로웠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영운은 부모님 곁을 떠난 지 한 달을 꽉 채웠는데 소식이 끊겨서 들을 길이 없으니 조석으로 초조하여 잠을 편히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 관직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벼슬하려던 생각이 필경 자신의 인생을 잘못되게 하였으므로 때때로 크게 탄식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이어, 校理 柳相祚가 지난 27일 입시 때 특별히 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가 지금 막 呈辭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반촌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없고 叔明(故寔軒 金熙洛) · 公穆(葛川 金煕周) · 君澤 등 여러 사람들도 모두 말미를 받고 내려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객지에서의 시름이 더욱 심해졌다고 하였다. 柳令이 또 備邊司의 東萊 府使 薦望에 들었는데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다고 하였고, 淸河 丈(海窩 金熙澤) 은 암행어사(당시 慶尙道 暗行御史 呂駿永)가 파직하기를 청한 대상에 올랐으나 상께서 용서하여 앞으로의 治績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禮安의 新寧 丈(磻窩 李龜錫)도 新寧邑의 일로 암행어사의 書啓에 거명되어 금명간에 서울로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柳長水(江皐 柳尋春)는 靑陽 縣監으로 바뀌어 임명되어 서울에 왕래하며 書筵에 출입하도록 하였으니, 며칠 안으로 서울에 온다는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지난 스무날께 邸吏에게 편지 한 통을 주었는데 그가 제대로 전달하였는지 물었다.
발급인 이영운은 본관이 韓山으로, 大山 李象靖의 손자이자, 艮巖 李埦의 아들이다. 후에 이름을 秉運으로 바꾸었다. 그는 全州柳氏 집안과 인연이 깊은데, 그의 누이인 韓山李氏가 柳星休의 아들인 寒坪 柳晦文과 혼인하여 定齋 柳致明을 낳았다. 또한 이완의 사위로 류회문 말고도 柳魯文이 더 있는데, 류노문은 壽靜齋 柳鼎文의 형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