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5월 24일, 이영운 등이 삯을 지급하는 시기 및 인쇄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
1797년(정조 21) 5월 24일에 俛齋 李永運(1766~1841) 등이 삯을 지급하는 시기 및 인쇄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번에 보내준 답장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이어 안부를 묻고, 상대의 병환이 이미 약효를 거두어 완쾌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또한 누이 韓山李氏의 병세가 근래 어떠한지도 물었다. 이영운 등은 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어버이께서도 그럭저럭 평안하시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한편, 活字 인쇄에 관한 일은 상대의 가르침을 소상히 받고서 이미 일을 맡은 여러 어른들께 말씀드렸다고 하였다. 다만 京手와 工匠들은 모두 열 손가락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허락을 받은 뒤에 돈을 지급한다면 그들이 입에 풀칠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소용되는 기계와 비용 등을 그들 스스로 빌릴 형편도 아니라고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李尙書는 ‘만약 하지 않으려면 그만이지만, 한다면 먼저 허락을 받기를 요구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삯을 주는 것도 너무 엉성하게 하는 문제가 있으니, 泮村이나 서울에 있는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물자를 보내와서 새기는 데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확실하면서도 쉽게 責成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에 묘리가 있는 듯하니, 상대의 의향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런데 원근의 친지들이 모두 활자로 인쇄하는 것을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보존성의 측면에서 板刻이 가장 좋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런 견해는 비용 등의 문제를 몰라서 나온 것인 듯하다고 하면서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시작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 원근의 여러 어른들과 충분히 상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막내아우가 누이의 병세를 보러 甥君과 함께 나아갈 것인데 여정이 바빠서 뵐 수 없을 듯하다는 등의 소식을 전하였다.
발급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영운은 본관이 韓山으로, 大山 李象靖의 손자이자, 艮巖 李埦의 아들이다. 후에 이름을 秉運으로 바꾸었다. 그는 全州柳氏 집안과 인연이 깊은데, 그의 누이인 韓山李氏가 柳星休의 아들인 寒坪 柳晦文과 혼인하여 定齋 柳致明을 낳았다. 또한 이완의 사위로 류회문 말고도 柳魯文이 더 있는데, 류노문은 壽靜齋 柳鼎文의 형님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