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년 8월 1일, 류통원 형제가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777년(정조 1) 8월 1일에 范溪 柳通源(1715~1787)과 柳道源(1721~1791)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1777년(정조 1) 8월 1일에 范溪 柳通源(1715~1787)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병중에 그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던 차에 심부름꾼이 전해 준 상대의 편지를 읽게 되니 매우 감사하고 다행하였다고 했다. 다만 상대의 눈병이 가볍지 않다는 것과 집안의 우환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柳通源 자신은 원래의 병증이 조금 덜해졌으나 식욕 부진은 예전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아울러 柳道源은 치통으로 인해 열흘 동안 자리에 누워 있고, 柳長源은 청송으로 들어가서 寓所의 짐을 수습하고 있다는 등의 근황을 전하였다. 葬禮는 추수철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라고 하고 묏자리에 후환거리가 많아서 집안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신중을 기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각 집안의 病憂가 없어질 날이 없고 청상이 된 며느리가 너무나 쇠약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여기에 어제는 또 東城의 외손녀가 병을 얻어 갑자기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혼사 날이 가까워져 모든 물품을 이미 마련한 상황이고 보면 그 광경이 매우 참혹하다고 하였다. 조물주는 어이하여 훌륭한 재주와 자질을 갖춘 외손녀를 태어나게 해놓고 단명에 그치게 하였느냐고 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표출하였다.
府의 일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수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더구나 몇 달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고 집안의 재력이 거덜 난 상황에 있음을 언급하면서 난감함을 표하기도 하였다. 柳通源은 근래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며 지낸다고 하면서, 바깥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에게만은 때때로 편지를 보내고 하는데 근심 걱정만 늘어놓을 뿐이라고 하면서, 매우 죄송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손자며느리가 매우 수척하여 걱정이라고 하고, 그 남편인 손자도 건강하지 못한 데다 학질을 앓아서 딴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병이 치유되면 문안드리러 보내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小山 李光靖 노형과 別檢 형에게도 늘 따로 편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인편이 번번이 재촉하여 後便에 편지하겠다고 핑계를 대다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부끄럽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발급인 柳通源은 자는 叔亨, 호는 笵溪이고 본관은 全州, 본적은 安東이다. 증손인 柳致明의 현달로 인해 나중에 司僕寺正에 추증된다. 柳道源은 자는 叔文, 호는 蘆厓이고 본관은 全州, 본적은 安東이다. 1711년 式年試 2등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1728년 李麟佐의 난에 창의한 친부 柳升鉉에게 증직을 내리면서 明陵參奉을 제수 받았고 이어 繕工監役을 제수 받았다. 저서로는 『退溪集攷證』․ 『四禮便考』․ 『日省錄』․ 『東獻輯錄』․ 『蘆厓集』 등이 있다. 편지 중에 기체후 용어 가운데 ‘道體’라는 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수신자는 大山 李象靖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영남지역 사족의 삶을 일부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결혼이 며칠 안 남았는데 병으로 죽은 외손녀의 처참한 상황, 일족 중 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 집안의 재산이 줄어드는 상황이 편지에 적혀있다. 즉 이 편지는 조선시대 사족의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