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4년 1월 17일, 류관현이 상대가 추천을 받은 것을 축하하고 찾아뵙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754년(영조 30) 1월 17일에 陽坡 柳觀鉉(1692~1764)이 상대가 추천을 받은 것을 축하하고 찾아뵙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전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있다. 오랫동안 격조했던 상황에서 자신이 關塞로 가게 되니 당신이 더욱 그립다고 하였다. 이는 柳觀鉉이 편지를 보내는 시기에 鏡城 判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 말이다. 이어서 새해를 맞아 상대가 복되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었다.
본론에서는, 근래 朝報를 보고서 조정에서 재야의 인재를 등용하려고 하고 있는데 상대가 맨 먼저 추천되었다는 것을 대략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신께서는 山林에서 수양하며 세상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지만 嶺南의 희망이 된다는 점에서는 한량없이 기쁘다고 하였다. 자신은 뜻밖에 변방의 관리가 되어 돌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하고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반 년 동안 데리고 있던 아들을 지금 부득이한 일이 생겨서 억지로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게 된 상황과 심정도 전하였다. 끝으로, 아들이 돌아온 뒤에 곧바로 상대를 찾아뵙고 싶기에 이렇게 대략 편지를 써서 보낸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簡紙 20폭과 붓 2자루를 약소한 줄 알면서 올린다고 하였다.
발급인 柳觀鉉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用賓, 호는 陽坡이고 본적은 安東 이다. 柳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柳振輝이고, 아버지는 柳奉時이며, 어머니는 通德郞 李以徵의 딸이다. 형 柳升鉉에게 수학하였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司憲府 監察이 되었다. 형 柳升鉉이 외직으로 나갔다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753년 鏡城 判官에 등용되었고 司諫․ 弼善 등을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가 鏡城 判官으로 있을 때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에 빠진 男丁들로부터 받는 세금과 巫稅로 바치는 布를 감면해주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흉년에 1,000여석의 양곡으로 飢民을 구제하였다. 配位는 善山金氏이며 슬하에 三男을 두었는데 柳通源, 柳道源, 柳長源이다.
이 편지는 영조의 탕평정치 일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영조 대 들어 탕평정치가 펼쳐지는 가운데 정계에 청남계들이 등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吳光運, 權以鎭이었다. 특히 權以鎭은 安東출신이다. 또한 편지에서 보듯이 山林의 인물들을 추천이라는 방식을 통해 등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영조의 탕평정치는 정조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정조시기에 嶺南지역의 『賓興錄』이 작성되고 『嶺南人物考』이 편찬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