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憲宗 3) 3월 11일, 金衍弘이 嚴貞三에게 薪木員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837년(憲宗 3) 3월 11일, 金衍弘이 嚴貞三에게 薪木員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문서의 일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안동에 세거하는 고성이씨 집안에는 조선시대 토지매매명문이 270건 가량 전해지는데, 문서의 작성 시기는 16세기부터 구한말까지를 포괄한다. 이 일련의 토지매매명문은 고성이씨가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거나, 매입한 토지의 본문기로서 함께 넘겨받은 것이다.
문서의 발급 시기는 ‘광17년 정유, 3월 11일’이다. ‘광’은 ‘도광’으로 보인다. 토지매매명문은 중국 연호를 이용하여 연도를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서의 수취자 즉 토지를 사는 주체는 ‘嚴貞三’이다. 문서의 발급자 즉 토지를 파는 주체는 ‘金衍弘’이다.
토지를 파는 사유는 ‘移買하기 위해서’이다. 移買는 토지가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운 토지를 사는 등의 이유 때문에 다른 곳의 토지를 사기 위해 파는 것을 말한다. 매각하는 토지의 소유 경위는 언급하지 않았다.
토지의 위치는 安東 南先面 內里 薪木員이다. 2필지를 함께 거래하였다. 각각 辨자 字號에 지번 68의 밭 3부 9속과 色자 字號에 지번 69의 밭 5부 5마지기이다. 지명에 나타나는 ‘員’은 ‘도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들판 이름에 붙는 접미어이다. ‘字號’ 및 ‘地番’, ‘負’ 및 ‘束’은 조선시대 양안제도에 따라 토지위치와 면적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마지기(斗落只)’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민간에서 사용하는 토지면적 단위로서, 1말의 볍씨를 뿌릴 만큼의 넓이를 가리킨다. 같은 성격의 섬지기(石落只-20마지기), 되지기(升落只-10분의 1마지기)의 용어도 있다.
매매 가격은 동전 50냥이다. 조선후기 숙종대는 상평통보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전국의 군현에 동전의 유통이 활성화된 시기이다. 다만 유통이 정착된 시점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안동에 세거하고 있던 고성이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토지매매명문에 나타나 있는 거래 수단을 확인해 보면, 포목이 사용된 가장 늦은 시점은 1707년(숙종 33)이고 동전이 사용된 가장 이른 시점은 1693년(肅宗 19)이다. 안동지방에 동전의 유통은 대략 1693년~1707년 즈음으로 볼 수 있다.
매매대상인 토지의 이전 매매명문인 本文記(=舊文記)는 토지를 파는 자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이는 매입자에게 모두 넘겨주어야 했고, 넘겨주지 못할 때는 그 이유를 명문에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문서에서는 본문기 2장을 함께 넘겨준다고 하였다.
문서의 말미에는 해당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이 차후에 본 거래에 대하여 이의나 분쟁을 제기할 경우를 대비하는 ‘追奪擔保文言’을 적는다. 이 문서는 ‘일후에 혹시 잡담이 있거든 이 문서로서 관에 고하여 변정할 것’이라고 표기하였다.
일반적인 매매명문에서는 가까운 사람이 증인과 筆執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증인은 朴就大가, 필집은 幼學 南이 참여하였다. 필집만 수결을 하였고, 발급자와 증인은 동그라미만 그렸다.
김성갑, 韓國學中央硏究院 博士學位論文,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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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