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英祖 24) 7월 21일, 同姓再從兄 李世慶이 再從弟에게 馬坪員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748년(英祖 24) 7월 21일, 同姓再從兄 李世慶이 再從弟에게 馬坪員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문서의 일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안동에 세거하는 고성이씨 가문에는 조선시대 토지매매명문이 270건 가량 전해지는데, 문서의 작성 시기는 16세기부터 구한말까지를 포괄한다. 이 일련의 토지매매명문은 고성이씨가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거나, 매입한 토지의 본문기로서 함께 넘겨받은 것이다.
문서의 발급 시기는 ‘무진7월21일’이다. 토지매매명문은 중국 연호를 이용하여 연도를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무진’ 상단에 연호가 표기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결락된 상태이다. 단 문서의 발급자 즉 토지를 파는 주체인 李世慶(1718~1799)의 생몰년으로 볼 때 무진년은 1748년이다. 문서의 수취자 즉 토지를 사는 주체는 ‘再從弟 李’까지만 보이고 이름은 결락되어 알 수 없다.
토지를 파는 사유는 ‘要用’까지만 표기되어 있고 나머지는 결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토지를 거래할 때 명문에 토지를 매각하는 이유를 명시하게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반면, 토지매매가 일상화된 조선후기에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적지 않고 ‘切有用處’라거나 ‘要用所致’와 같이 간단히 표현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매각 사유는 ‘要用所致’ 즉 ‘요긴히 쓸데가 있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매각하는 토지의 소유 경위는 해당부분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 토지의 위치는 馬坪員이다. 양전 상의 字號는 叔자이고, 지번이 36인 토지의 북쪽면이다. 토지의 면적은 9負이다. 지명에 나타나는 ‘員’은 ‘도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들판 이름에 붙는 접미어이다. ‘字號’ 및 ‘地番’, ‘負’ 및 ‘束’은 조선시대 양안제도에 따라 토지위치와 면적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매매 가격은 동전 30냥이다. 조선후기 숙종대는 상평통보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전국의 군현에 동전의 유통이 활성화된 시기이다. 다만 유통이 정착된 시점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안동에 세거하고 있던 고성이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토지매매명문에 나타나 있는 거래 수단을 확인해 보면, 포목이 사용된 가장 늦은 시점은 1707년(숙종 33)이고 동전이 사용된 가장 이른 시점은 1693년(肅宗 19)이다. 안동지방에 동전의 유통은 대략 1693년~1707년 즈음으로 볼 수 있다.
매매대상인 토지의 이전 매매명문인 本文記(=舊文記)는 토지를 파는 자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이는 매입자에게 모두 넘겨주어야 했고, 넘겨주지 못할 때는 그 이유를 명문에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문서에서는 ‘本明文’ 4장을 함께 넘겨준다고 하였다.
문서의 말미에는 해당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이 차후에 본 거래에 대하여 이의나 분쟁을 제기할 경우를 대비하는 ‘追奪擔保文言’을 적는다. 이 문서는 ‘나중에 잡담이 있거든 이것을 가지고 변정할 것’이라고 표기하였다.
일반적인 매매명문에서는 가까운 사람이 증인과 筆執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증인이 따로 없고, 필집도 발급자가 직접하고 수결하였다.
김성갑, 韓國學中央硏究院 博士學位論文, 2013
『韓國法制史攷』, 박병호, 법문사, 1987
『고문서연구』12집, 이영훈, 한국고문서학회, 1998
『안동학연구』 6집, 이욱, 한국국학진흥원, 2010
『朝鮮中期田畓賣買硏究』, 이재수, 집문당, 2003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명경일